바보에게, 못난이가

"절대 앉아서 사람을 맞는 법이 없으셨어요. 문 앞까지 와서 두손을 덥석 잡으시곤 직접 소파에 앉히셨죠. 돌아갈 때도 차 타는 곳까지 직접 배웅하시고…."

김성수(82) 성공회 주교가 책상 옆 서가에 놓인 사진 액자 하나를 내보이며 말했다. 사진 속엔 1984년 처음 주교 서품을 받은 김 주교와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이 나란히 서 있었다. 김 주교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1984~1995)과 한국이 독립관구로 승격된 뒤 첫 관구장(1990~1995)을 지내며 김 추기경과 교류했다. 김 추기경 선종(善終) 3주기였던 16일, 인천 강화군의 지적장애인 자활공동체 '우리마을'에서 김 주교를 만났다. 그는 "김 추기경은 누구든 한 번 만나면 오래 잊을 수 없는 분"이라고 했다. "오늘 같은 날 사진을 꺼내놓고 가만히 만져 보면 더 생각이 나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추기경 묘소에서 잔디를 어루만지다 가는 것처럼." 김 주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기경을 그리워하는 이유를 '눈높이', '경청(傾聽)', '비움'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했다.

◇눈높이="대한민국 억울한 사람들은 전부 명동성당 앞에다 천막을 치던 시절이었죠. 추기경님은 천막 안에 들어가면 항상 농성자들 앉는 자리 위에 사제복 차림 그대로 그들과 함께 털썩 앉으신 뒤 눈을 맞추며 얘기하셨어요." 김 주교는 "정부로부터든 교회 내부로부터든 직·간접적으로 농성자들을 돌려보내라는 요청과 압력도 엄청 받으셨을 것"이라며 "그 엄혹한 시대에, 성당 앞에 천막 친 사람들을 내치지 않고 지켜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 주교는 한국인 첫 성공회 주교였던 고(故) 이천환(1922~2010) 주교와 김 추기경이 얘기나누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다. "두 분이 개띠(1922년생) 동갑내기예요. '개띠 둘이 모였으니 개판'이라며 함께 웃으시곤 했죠."

◇경청=1980년대 중반, 김 주교는 추기경과 함께 한 노조 집회에 참석한 기억도 떠올렸다. 근로자들 앞에 선 추기경은 "여러분이 이렇게 찬 바닥에서 찬밥 먹으며 고생하는데 나는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있다. 그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김 추기경 다음에 발언하게 된 김 주교는 '나도 미안하단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제 호텔 뷔페에서 6만원짜리 밥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정말 미안합니다." 그때, 김수환 추기경이 소리 내서 껄껄껄 웃었다. 싸늘했던 집회장 분위기가 단번에 녹아내렸다. 김 주교는 "항상 푸근한 미소만 지으시던 추기경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 웃으시는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했다. "절대 목소리를 키워 자기주장을 앞세우거나, 남을 윽박지르는 일이 없었어요. 항상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분이었죠."

◇비움=김 주교는 또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하셨다. 철저히 스스로를 비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라고도 했다. "추기경님처럼 단단하게 영근 사람이 그렇게까지 낮아질 수 있다는 게 놀랍죠. 사실 '바보'라는 말은 내가 먼저 쓰려고 했는데, 추기경님께 선수(先手)를 뺏겼어요. 그래서 요즘은 '난 못난이다' 그러고 다니지요." 김 주교는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스스로를 비우고 낮추는 자세가 더 필요하다. 그런 마음 가진 사람들이 정말 세상 전체를 포용할 수 있다"고도 했다. "생각해 보세요, 나만 잘난 사람들끼리 만나서 대화가 되겠어요?"

김 주교는 2년 반 전부터는 인천 강화군에 있는 지적장애인 자활공동체 '우리마을'에서 산다. 53명의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며 하루 2500봉지의 콩나물을 생산해 '강화도 우리마을' 브랜드로 풀무원에 납품하는 곳이다. 김 주교는 '촌장' 모자를 쓰고 다니고, 장애인들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강화도 우리마을 콩나물 많이 사주세요." 콩나물 봉지를 들고 활짝 웃는 '못난이' 김 주교의 미소가 '바보' 김수환 추기경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