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시간 트럭 운전해가며 음반 녹음 배워"
입력 : 2012.02.18 03:05
한국인 최초로 그래미상 최우수 녹음기술상 받은 황병준 엔지니어
"음악이 내가 진정 원한 것" 공대 석사 마치고 美유학갔다 음반 엔지니어링 공부
스튜디오서 청소부터 배워… "다음엔 국악 음반으로 도전"
"올해의 기술상 수상자는 앨드리지(Aldridge)…." 탈락? 황 대표는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거꾸로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황씨가 초조한 나머지 뒷부분을 미처 듣지 못한 것이었다. 수상 발표는 정확히 "작곡가 앨드리지의 오페라 음반 '엘머 갠트리'를 녹음한 황병준과 존 뉴턴, 제시 루이스"였다. 깜짝 놀라 단상에 오른 한국인 수상자는 딸을 향해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아빠 그래미상 탔다." 한국인이 그래미상 시상식 무대에 올라 상을 받은 건 처음이다.
황씨의 '그래미상 도전'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4년 전인 2008년에도 그는 자신의 스승이자 미국 사운드미러본사 대표인 존 뉴턴과 함께 녹음한 러시아 작곡가 그레차니노프의 합창 음반 '수난 주간'으로 클래식 음반 최고기술상을 받았다. 당시에는 스승인 뉴턴이 대표로 수상했고 황씨는 조력자로 남았다. 반면 이번에는 당당히 공동 수상자로 정식 기록됐다.
황 대표는 서울대 전기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쳤다. 대학 시절 학교 음악감상실에서 3년간 DJ를 맡았고 기독교 노래운동 동아리에서는 드럼과 '군기반장'으로 활동했다. 이 동아리의 라이브 공연 때도 녹음은 응당 그의 몫이었다. 황 대표는 "초등학교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우고, 중학교 때 성가대 활동을 하고, 고교 때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었던 그 시절부터 한 번도 음악을 떠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 그는 헤드폰과 CD 300장을 들고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기 위해 펜실베이니아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입학 직후 학교를 그만뒀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눈앞에 주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고민하고 방황했다. 반년간 오로지 나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말했다. 결국 '음악을 듣는 일만큼은 지칠 줄 모른다'는 해답을 얻은 그는 보스턴의 버클리음대에서 음반 엔지니어링을 공부했고, 1999년 미국의 클래식 음반 녹음 스튜디오인 사운드미러에들어갔다.
처음에는 엔지니어 5명 가운데 막내였기 때문에 스튜디오 바닥 청소부터 배워나갔다. 시각 장애인 테너인 안드레아 보첼리의 미국 공연 때는 녹음 장비를 가득 실은 대형 트럭을 직접 몰고 하루에 1500㎞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는 "아침 5시에 차에 시동을 걸고 17시간 동안 운전해서 밤 10시에 콘서트 현장에 도착하면 한숨도 돌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밤새 장비를 설치해야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녹음은 인위적일 수밖에 없는 스튜디오보다는 그 소리가 태어나는 현장에서 담아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살리는 건 그의 소리가 지닌 특징이다.
2000년 스승 뉴턴의 허락을 받고 한국에 첫 해외 지사를 설립한 황씨는 태평양을 넘나들며 한국과 미국에서 음반 녹음작업을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등 클래식 음반작업과 함께 영화 '스캔들' '마더' 등의 음악작업에도 함께 참여했다.
지난해에는 전남 순천 송광사의 새벽 예불을 음반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는 "새벽 3시 목탁 소리로 시작해서 독송 소리와 사물의 소리, 북소리와 범종 소리로 이어지는 송광사의 새벽 예불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천년(千年)간 계속된 우리의 소리"라고 말했다. 불가(佛家)의 소리를 세속의 음반으로 담아내는 데 송광사 주지 영조 스님이 반대하자 그는 한 달간 송광사에서 숙식하면서 설득했다. 황씨는 "송광사의 예불은 소리가 그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라며 "영하의 날씨에도 매일 새벽에 나가서 두 시간씩 녹음했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 음악인 국악 음반으로 그래미상을 타는 것이 황씨의 꿈이다. 그는 "산조와 풍류 음악, 판소리와 수제천(壽齊天)까지 세계 시장에 선보일 우리 음악은 무궁무진하다. 최고의 기술과 정성으로 녹음한다면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