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동네 의사 송태호의 진료일기] '진료 메뉴판' 덕분에 癌까지 발견… 기적은 노력할 때 오는 법

우리 병원 대기실에는 일종의 '메뉴판'이 있다. 무슨 검사는 얼마, 무슨 진료는 얼마 식으로 써놓은 게시물이다. 비보험 진료항목과 진료비를 환자들이 볼 수 있게끔 게시해야 한다는 정부의 친절한(?) 규정 때문에 마련한 것이다. 이 메뉴판을 볼 때마다 병원의 격(格)이 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이 게시물 덕분에 한 60대 남자환자가 기적적으로 암을 발견하자, 그런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앓던 이 환자는 부인에게 이끌려 내원했다. 경동맥에 동맥경화판을 가지고 있으며 흡연과 음주를 즐기면서도 비교적 약을 잘 복용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상태였다. 가끔 핑 도는 어지럼증을 느낀다기에 혈액검사를 비롯한 검사들을 했으나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이 환자를 내보내고 다음 환자를 보는데 진료실 모니터에 간호사 메모가 떴다. "원장님, 방금 나온 환자가 암 표식자 검사를 하고 싶으시대요." 환자가 메뉴판을 본 게 틀림없었다.

다시 환자를 불러 몇 가지 문진을 한 뒤 기왕 채혈한 김에 암 표식자 검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며칠 후 나온 혈액검사 결과에서 'PSA(Prostatic Specific Antigen·전립선 특수항원)'라는 암 표식자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왔다. 이 수치는 전립선 질환에서 올라가는데 암인 경우에는 매우 높게 나오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나 수치가 그리 높지 않았고 환자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전립선 비대로 판단하고 비뇨기과 진료를 권했다.

이후 환자가 혈압 때문에 매달 내원할 때마다 비뇨기과 검진을 독촉했더니 환자는 마지못해 비뇨기과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PSA가 더 높아졌고, 비뇨기과 의사로부터 조직검사를 권유받았다. 환자는 "입원까지 하면서 꼭 조직검사를 해야 하느냐"며 투덜거렸지만 꼭 해봐야 한다고 강력히 권했다. 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전립선 조직 12개 중 6개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것이다. 이 환자는 서둘러 수술을 마치고 현재 회복 중이다.

만일 이 환자가 그때 암 표식자 검사를 안 했더라면, 내 말을 무시하고 비뇨기과 검사를 안 했더라면, 조직검사 권유를 무시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이런 몇 가지 일들이 겹치고 겹쳐 환자는 기적처럼 조기에 암을 발견했고 완쾌할 기회를 얻었다.

'기적'의 사전적 풀이는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따라서 기적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에 쓸 수 있다. 그러나 '경기 종료 직전 기적 같은 자살골' 같은 표현을 쓰지 않듯, 실생활에서는 대개 좋은 일에 대해 쓴다.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운이 좋은 경우에 '기적'이라고 한다.

나는 기적을 믿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기적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간절하게 한 결과, 불가능하리라는 상식을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나 같은 동네의사에게도 가끔은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불치병과 난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기적을 믿어야 한다. 믿을 뿐 아니라 기적을 만들기 위해 간절히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불치병 환자들이 '완치 불가능'이란 상식을 뛰어넘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