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떠난 발길, 저가 브랜드로… 대기업도 뛰어들어

스웨덴의 저가 패션 브랜드 H&M은 3월 8일 명품브랜드 마르니와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협업) 제품 출시를 앞두고 2000개 가까운 핫팩과 일회용 커피를 준비하고 있다. 매장 앞에서 밤새 줄을 서는 손님들을 위해서다. H&M은 2년 전부터 명품인 소니아리키엘·랑방·베르사체와 콜라보레이션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디자인은 명품디자이너가 맡지만 제작·유통은 H&M이 맡아 가격을 (명품 대비) 최대 10분의 1로 떨어뜨린 것. 작년 11월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처음 선보인 서울 명동점은 개장 전날 낮부터 1000여 명이 몰려 밤새 줄을 서 기다렸고, 개장 하루 만에 대부분의 제품이 팔렸다. H&M 측은 "한 사람당 쇼핑 시간과 물건 수를 제한해야 할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올해도 얼마나 몰려들지 긴장하고 있다"고 했다.

저가 화장품브랜드인 미샤는 대표적인 고가화장품인 SKII와 에스티로더를 상대로 '간 큰' 비교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미샤는 '더 이상 값비싼 수입화장품에 의존하지 않도록'이란 광고문구와 함께, 에스티로더의 '갈색병'(에센스)과 자사의 '보라색병'(에센스) 사이에는 가격(각각 약 16만원, 4만원) 차이만 있을 뿐 품질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내외 명품 화장품과 경쟁관계를 부각시키면서 소비자들에게 '가격은 싸지만 품질은 최고'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것이다. GS홈쇼핑은 '홈쇼핑=저가판매망'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최근 유럽 명품주방브랜드인 WMF의 믹싱볼과 로얄알버트유리도마를 사은품으로 내놨다. 업체 관계자는 "사은품에 몰린 관심 덕에 두 달 만에 (사은품이 걸린) 제품이 10만 개나 팔려 깜짝 놀랐다"며 "앞으로 명품사은품을 통해 이미지도 제고하고 판매도 늘릴 것"이라고 했다.

불황을 이기려는 저가 브랜드의 변신이 계속되고 있다. H&M의 콜라보레이션처럼 명품의 '브랜드'를 빌려오는가 하면 제일모직 같은 대기업 브랜드가 저가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대중시장에 새롭게 뛰어들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이 저가시장에 뛰어든 것은 불황과 소비 위축 때문이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국내 백화점 3사의 여성의류 매출은 작년 대비 16.5%가 줄었고, 전체 백화점 매출도 4% 이상 감소했다.

반면 백화점을 떠난 발길은 저가 브랜드로 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SPA(Speciali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생산자 유통방식)로, 디자인·생산·유통·판매 전 과정을 제조회사가 맡아 비용과 가격을 대거 내린 사업모델이다. 작년 국내 패션시장 성장률은 4%가 채 안 됐지만 SPA시장은 매년 평균 50% 늘어 시장이 1조9000억원대까지 성장했다. 자라·유니클로·H&M 등 해외 업체들이 국내 SPA 시장의 80~90%를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대기업들도 최근 '토종 SPA'로 승부를 걸었다. 대표적인 것이 제일모직의 '에잇세컨즈'(8seconds)로 23일 서울 명동과 가로수길에 매장을 열 계획이다. 제일모직 측은 "제일모직의 내공을 살려 최고 품질의 캐주얼웨어를 합리적인 가격에 내놔 중국시장까지 공략할 것"이라고 했다.

주로 백화점에 입점하던 고가 브랜드가 홈쇼핑·온라인몰에 진출해 활로를 찾는 사례도 늘고 있다. 고급 백화점만 고집하던 유통 방식을 바꿔 고객 저변을 넓히는 셈이다. 제일모직은 21일부터 고가브랜드 빈폴·빈폴진·빈폴골프·니나리치·갤럭시·나인웨스트·스티브매든 등을 온라인몰인 11번가에서 팔고 있다.

연세대 경영학부 서길수 교수는 "경기침체로 중간 소비층이 사라지면서 저가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면서 "고가 이미지 뒤에서 펼쳐지는 저가전(戰)은 앞으로도 치열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