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등용문 EMI 매각… 세계 음반시장 요동친다

비틀스와 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젊은 시절 지휘자 카라얀의 공통점은?

정답은 '음반사 EMI의 아티스트'다. 하지만 붉은색 로고를 자랑하던 영국의 이 명문 음반사는 현재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는 신세다. 지난해 11월 음반 부문은 유니버설뮤직에, 지적재산권을 관리하는 출판 부문은 소니에 각각 분할 매각되기로 한 것. 이 합병 계약 이후, 세계 음반 시장에 격렬한 후폭풍(後爆風)이 일고 있다. EMI는 한국계 영재 연주자들의 등용문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음반 시장도 이 파장에서 자유롭지 않다.

◇음반 시장의 공룡 탄생

합병이 완료되면 유니버설뮤직은 사실상 천하통일을 이루게 된다. 클래식 음반에서 유니버설뮤직은 노란색 로고(도이치그라모폰)와 파란색 로고(데카)에 이어서 빨간색 로고(EMI)까지 접수하게 되는 것. 워너뮤직 같은 경쟁사와 독립 음반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워너뮤직의 에드가 브론프먼 이사는 "음반은 물론, 디지털 음악 시장의 미래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수퍼 메이저 회사가 탄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럽 독립 음반사 협회인 임팔라(Impala)의 헬렌 스미스 대표도 "음악 시장이 거대 회사 중심으로 변하는 건 음악인이나 소비자, 온라인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유니버설뮤직이라는 '거함(巨艦)'에 맞선 이들 연합군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고 있는 곳이 유럽연합(EU) 내에서 시장 독점이나 경쟁 저해 행위를 감시하는 유럽위원회(EC)의 경쟁위원회다. 이들은 유니버설뮤직이 유럽 일부 국가에서 이미 50% 이상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합병으로 독과점 지위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쟁위원회는 3월 말까지 심사를 마칠 예정이라고 했지만, 자칫 심사 기간이 반년 이상씩 장기화할 경우, 합병 작업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관측도 있다.

◇합병 지연, 음반 녹음도 '올스톱'

합병 작업이 지연되자 거꾸로 초조해진 쪽은 EMI다. 현재 EMI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 사이먼 래틀 등 일부 음악인을 제외하면, 장기 계약을 대부분 중단한 상태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32)과 첼리스트 장한나(30), 피아니스트 임동혁(28) 등 EMI 소속 한국계 연주자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있다.

12세 때 데뷔 음반을 낸 이후 18장의 음반을 발표하며 EMI의 간판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 잡은 사라 장은 지난 2009년 브람스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지막으로 신보 소식이 없다. 합병이 성사되면, 유니버설뮤직의 DG와 데카 레이블에서 활동하는 재닌 얀센(34), 힐러리 한(33), 율리아 피셔(29) 등 동년배 바이올리니스트들과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2009년 베스트 음반을 내놓았던 첼리스트 장한나는 최근 바이에른 청소년 교향악단,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독일 밤베르크 심포니, 미국 시애틀 심포니 등 지휘를 겸업하면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국내 유니버설뮤직 관계자는 "음반 시장의 전반적인 불황 속에서 녹음 계획이나 시장성 등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건 결국 연주자 개인의 몫"이라고 말했다.

[EMI의 마지막 승부수?] 한국계 신인 임현정 발굴베토벤 소나타 전곡 발매

승부수일까, 무리수일까. 유니버설뮤직에 합병될 EMI는 최근 한국 피아니스트 임현정(26·사진)과 전속 계약을 맺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을 음반 8장으로 발매하고 있다. 임현정은 12세 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을 마쳤으며, 2007년 프랑스 파리의 FLAME 콩쿠르에서 1위 입상했다. EMI는 이달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과 29번 '함머클라비어' 등을 담은 첫 번째 음반(CD 2장)을 출시했고, 세계 시장에서 올해 3차례로 나눠서 전집을 발매할 계획이다.

하지만 음반 제작사가 EMI라는 것이 관심이다. 기존 소속 연주자들의 장기 계약과 신규 음반 발매조차 중단된 가운데, EMI가 신인 발굴에 공을 들여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데뷔 음반으로 내놓는다는 것이 이례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