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韓流' 3.0시대

2010년 충남 천안에 있는 국내 바이오 R&D 업체 '유니젠'에 미국인 손님이 찾아왔다. 에스티로더그룹 제품개발혁신팀 하비 게돈(Gideon) 총괄 수석 부사장이 이 회사에서 개발한 기능성 화장 원료를 살펴보기 위해 방문한 것. 게돈 부사장은 유니젠이 '도라지난초'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 '다이아넬라 엔시폴리아'에 주목했다. 얼룩덜룩하고 칙칙한 피부색을 균일하고 환하게 가꿔주는 효능이 입증된 물질이었다. '도라지난초'는 일본과 동남아의 몇몇 섬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우리와 독점 공급 계약을 맺읍시다!" 유니젠 측 설명을 듣고 '다이아넬라~'의 효능을 눈으로 확인한 게돈 부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로더 측은 유니젠이 개발한 이 성분을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 '크리니크(Clinique)'의 신제품 '이븐 베터 크리니컬 다크 스팟 코렉터'의 핵심 성분으로 사용했다. 결과는 '대박'. 지난해 미국은 물론 프랑스·영국 등 유럽에서도 동종 에센스 품목 중 판매 1위를 기록했다.

한국 화장품과 한국 여성들의 화장법이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등 몇 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화장(化粧) 한류 2.0'이 이제는 한국산 화장품 원료의 세계시장 진출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국내 전문가들은 "화장 한류의 3.0 시대 개막이라고 할 만하다"고 한다.

'화장 한류 3.0 시대'의 현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지난달 초 미국 뉴욕 크리니크 본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글로벌 마케팅 디렉터 샌드라 스타츠(Statz)씨는 "우리 회사 연구팀원은 수시로 한국을 드나들며 제품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한국 고객들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화장품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에 한국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를 알아야 세계 트렌드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크리니크 측은 유니젠과 독점 계약을 맺고 만든 이 제품을 처음 내놓을 때만 해도 "결과에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화이트닝 제품은 사실 그동안 아시아에서만 인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미국에서 출시하자마자 백인부터 흑인·히스패닉 여성에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단순히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것을 넘어, 잡티와 여드름 자국, 얼굴에 자꾸만 생기는 반점을 막아준다는 점에서 백인·유색인종 여성에게까지 사랑을 받은 거죠."

이 회사가 지난해 말 내놓은 한 수분 크림도 한국을 '공부'한 덕에 나왔다고 한다. 스타츠씨는 "크리니크 임원진이 지난해 겨울 한국을 방문해 시장조사를 하다 개발했다. 그전까진 보통 질감이 가벼운 크림을 만들었는데 임원진이 한국을 여행하면서 '한국의 건조한 겨울바람을 이길 수 있는 촉촉한 제품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다른 외국계 화장품 회사도 '한국'을 내세운 마케팅을 하기에 바쁜 건 마찬가지. 뉴욕에 본사를 둔 화장품 브랜드 맥(M.A.C)은 올해 3월 '코리안 스킨(Korean Skin)'이란 구호 아래 7가지 스킨케어 제품을 출시한다. "한국 여성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피부 표현을 원하는 전 세계 여성의 마음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신제품"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화장품 회사 키엘 역시 최근 "한국 고객을 공부하면서 화이트닝 라인을 개발했다"고 했다. "자외선 차단제는 원래 오일 프리 제품을 만들지 않았으나, 한국 소비자들이 이런 제품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만들어 미국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