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훔쳐 타인으로 사는 여인

오는 8일 개봉하는 영화 '화차'(감독 변영주)의 여주인공 선영은 아버지가 죽으면서 남긴 사채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친다. 만약 누군가에게 들키면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가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쳐 나타난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점은 배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치며 빠르게 파괴되어가는 선영과 달리, 배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슴에 달 때마다 조금씩 더 성장해간다. '선영'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배우 김민희(30)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28일 서울 신문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시나리오를 보고 강한 의욕을 보였다던데.

"삶이 파란만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선영이란 인물이 딱 그렇다.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의 영화와 인물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란만장한 인물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겠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래서 연습하고 준비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집중하고 감독님과 소통하는 게 필요했다. 초반에 감독님이 '네 얼굴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많은 걸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대로 내 얼굴에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믿고 그것을 꺼내려 노력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터미널에서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는 장면. 맞는 건 잠깐의 아픔만 참으면 되는 거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에게 버림받고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진 스물한 살 주인공을 표현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난 건가'라는 체념은 물론, 앞으로 이어질 비극을 표정으로 예고해야 했다. 최대한 노력해 연기했는데 내 모습 같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역할은 파란만장한데 영화 속 장면 곳곳에서 '모델 김민희'의 모습이 느껴지더라.

"나는 미녀도 아니고 키도 169㎝밖에 안 된다. 몸매가 글래머도 아니고. 한 번도 내가 모델 같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다만 화보에 등장할 수 있는 건 내가 상황에 맞는 분위기를 표현하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언제부터 스스로 배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나.

"연기 욕심을 느끼고 잘하고 싶다고 느낀 건 스물네 살 무렵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를 할 때다. 그전에는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를 몰랐다. 그 나이에 자신의 목표를 발견한다는 게 빠른 건지 느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또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할 때 나는 배우의 길을 내 길로 삼기 시작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