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언어가 녹아, 소설이 되다

쓰지 않았을 때의 고통이 쓸 때의 고통을 압도할 때 작가는 쓰기 시작한다. 김영하(44)가 신작 '너의 목소리가 들려'(문학동네 출간)를 미국 뉴욕에서 보내왔다. '퀴즈쇼'이후 5년 만의 장편. 짧지 않은 휴지기다. 사실 집필의 시작은 '퀴즈쇼' 발표 직후. 초고(草稿)의 상당 부분을 그해에 마무리했지만, 진척은 느려졌다. 쓸 때의 고통을 그는 '괴로웠다'는 형용사로 털어놨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청소년들. "현실보다 훨씬 순화해서 쓰고 있었지만, 그 야생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단 덮었다. 그리고 다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 작품이 다시 돌아와 작가를 괴롭혔다고 했다. 뉴욕에서 1년7개월째 체류 중인 작가는 전화·이메일 인터뷰에서 "개개의 소설은 작가와 어떤 인간관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친구 같은 소설·자식 같은 느낌이 드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이 소설은 마치 자기 중심적인 독재자처럼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고는 '죄책감'이란 표현을 썼다. 쓰지 않던 시점의 고통을 물었을 때의 대답이었다.

◇ 터미널 화장실에서의 출산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동규는 친구 제이가 죽고 나서 환청을 듣는다. 친구의 목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리는 것이다. 주유소에서 먹고 자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규가 느끼는 감정 역시 '죄책감'. 그는 경찰에 제이를 고자질했고, 친구의 죽음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제이는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노숙자 소녀가 고속버스터미널 화장실 변기에서 출산했던 이 사회 비극의 소산. 동규는 엄마와 삼촌의 불륜을 목격한 뒤 정신의 폐소공포증이라 불리는 함구증(緘口症)에 걸려 입을 닫은 소년이다. 소설은 이 불우한 친구들의 성장을 목격하면서 인간이 과연 타인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는 종족인지를 건조하게 묻는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가출 청소년들의 삶은 핏내와 살내 가득한 야생 그 자체다. 논리가 실종된 폭력과 감정이 휘발한 섹스의 먹이사슬. 작가는 야생의 언어를 문학의 언어로 녹여내면서 독자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묻는다. 가독성 강력한 이야기의 수면 밑바닥으로 가라앉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시대, 작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 만약 톨스토이가 아니었다면

소설에서 제이에게 주어진 역할은 '고통을 감지하는 센서'다. 보육원 독방에 갇혔을 때 제이는 감각의 이탈을 경험한다. 사물이나 사람에 빙의(憑依)해 그 존재의 감정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그러고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벌써 죽었어야 할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그 대목에서 찾는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적자생존에 한없이 불리해 보이는 작가가 살아남은 이유도 그것일 것이다. 김영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예로 들었다. 만약 안나가 요즘 시대의 사람이고, 더군다나 톨스토이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삶은 '열차에 뛰어든 불륜녀로 출근길 1시간 불통'이라는 단 한 줄로 요약됐을 것이라는 것. 그는 "주인공 제이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느끼고 표현한다"면서 "표현의 가능성을 넓혀 지각의 범위와 깊이를 넓히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고는 "작가가 없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는 있겠지만, 그 공감에 예술적 형식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쉽게 휘발하거나 의도가 있는 다른 불순한 메시지에 흡수되고 말 것"이라고 덧붙였다.

◇ 죄책감 이후의 작가

장편 데뷔작이자 출세작이었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1996) 이후 16년. 그의 장편을 놓치지 않고 따라 읽어 왔던 독자들이 늘 했던 경험이지만, 작가는 장편마다 그가 창의한 규칙으로 소설의 정의를 새로 써왔다. '나는…'이 탈근대적 징후를 누구보다 선구적으로 포착했다면, '아랑은 왜'(2001)에서는 소설의 생존 가능성을 다윈으로 풀어내는 참신함을 보였고, '검은 꽃'(2003)은 역사 소설, '빛의 제국'(2006)은 스파이 소설, '퀴즈쇼'(2007)는 성장소설의 문법을 자신의 언어로 재정의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장편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그는 다시 문학의 원점으로 돌아가 "작가는 누구인가"를 정직하게 묻는다. 자신의 내면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고백을 경멸했던 이 쿨한 모더니스트로서는 의외의 풍경이랄까. 인터뷰 말미, 그가 반복한 표현은 '죄책감'이다. 죄책감을 털어버린 이 작가의 다음 장편이 한층 더 궁금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