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탈출 뭉칫돈, 두 갈래 길에 서다

"돈 벌겠다고 펀드에 투자했지만 버는 즐거움보다 잃는 공포 때문에 힘들었어요. 힘겹게 원금을 회복했으니 이제부턴 안전운행해야죠."(회사원 황소민씨)

코스피지수가 2000선을 돌파한 덕에 손실을 만회한 펀드 투자자들이 대거 환매에 나서고 있다. 지난 1~2월에만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 4조원이 넘는 자금이 빠져나왔고, 향후 주가 움직임에 따라 최대 3조원에 달하는 환매 폭탄이 터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펀드에서 이탈한 투자자들은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을까?

다소 공격적인 부류는 부동산 침체, 저금리, 세계 경기 둔화 등 불확실성이 높아진 재테크 여건을 감안, 환금성 좋은 단기 상품에 돈을 묻어두고 있다가 주식보다는 안전하고 예금보다는 고수익을 내는 먹잇감이 나타나면 재빨리 달려들어 수익을 내는 게릴라 전법(戰法)을 구사하고 있다.

반면 좀 더 보수적인 투자자들은 펀드 상품은 외면한 채 정기예금, 저축성 보험처럼 원금을 지킬 수 있는 안전한 곳에서 속편한 '웰빙 투자'에 몰두하고 있다.

◇'돈 된다' 소문 쫓아 게릴라식 투자

최근 여의도 증권가에선 5조원대 투자금을 끌어모은 해운업체 STX팬오션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가 화제가 됐다. BW란 미리 약정된 가격으로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채권을 말한다. 지난달 27~28일 진행된 청약에서 해운시장 업황이 부진해 청약률이 그리 높지 않을 것이란 예상을 뒤엎고 STX팬오션 BW는 21대1이란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청약 주관사인 동양증권 관계자는 "3년 만기 금리가 연 5%로 높으면서 주식 행사 가격은 현 주가보다 낮아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소문이 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펀드에서 이탈한 자금은 공모주나 실권주 청약 등 안전하게 돈 벌 기회가 보인다 싶으면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김종석 우리투자증권 압구정WMC 부장은 "올해 상장 예정 기업의 주식을 장외에서 사고 싶다는 고객이 적지 않다"면서 "가격이 떨어지면 1억원어치 잡아달라며 예약을 걸어두기도 한다"고 말했다.

고수익 투자처를 물색하며 대기하는 자금이 많다 보니, 입출금이 자유로우면서 금리도 높은 단기 상품엔 자금이 차고 넘친다. 대우증권의 단기 금융상품인 MMT(특정금전신탁)는 신규 고객에 한해 연 3.7% 수익을 주는데 올 들어 잔액이 800억원을 넘어섰다. 권문규 한국투자증권 차장은 "펀드 이탈 자금 중 일부는 증시 주변에서 맴돌다가 공모주·실권주 청약이나 BW 등 좀 더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는 투자처가 나타나면 집중적으로 몰려가고 있다"고 전했다.

◇보수적 투자자는 '안전 운행' 몰두

게릴라식 투자에 열을 올리는 공격적 투자자들과 달리 보수적 성향의 투자자들은 펀드 환매로 생긴 투자금을 원금 손실 위험이 없는 예금과 보험상품으로 옮겨 담고 있다.

지난달 국민·신한·우리·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정기예금은 10조7000억원이 늘었다. 1년 만기 예금 금리가 연 4% 안팎이어서 여타 상품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낮은데도, 지난해 같은 기간 증가분의 두 배 이상에 달했다. 연 5%대 저축보험에도 뭉칫돈이 몰리고 있다. 삼성생명(연 5.1%)과 대한생명(연 5.2%)의 장기 저축성 보험은 올 들어서만 30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빨아들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늘어났다.

또 원금 손실 위험이 낮으면서 안정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대안 상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달 27~28일 하이투자증권은 연 7% 배당이 예상되는 선박 펀드를 팔았는데, 총 841억원의 자금이 몰려 단숨에 한도가 꽉 찼다. 선박 펀드란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모아 선박을 건조한 후에 해운사에 임대해주고 임대료를 받아 투자자들에게 배당을 하는 상품이다. 지난달 미래에셋이 판매한 연 8% 예상 수익을 내건 '브라질 부동산 펀드'도 투자금이 대거 몰려 판매 목표금액 800억원을 일찌감치 다 채웠다.

이 상품은 브라질 중심가에 있는 대형 오피스빌딩에 투자한 다음 임대수익을 거둬 투자자들에게 배당 형태로 돌려준다. 최창훈 미래에셋맵스 부동산부문 사장은 "투자 기간이 7년에 달하는 데다 중도 환매가 불가능한 폐쇄형 펀드인데도 개인 투자자들이 몰려 펀드 모집이 조기 마감되는 사례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