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마이크 대신 붓 들었다… 恨이 많아서

"그림을 '제대로' 배운 사람들과 비교하면 붓 터치나 구도 잡는 실력은 많이 부족할지 몰라요. 하지만 제 그림엔 저만의 스토리가, 제가 살아온 날들이 녹아 있습니다."

7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인사동 라메르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여는 트로트 가수 배일호(55)씨의 오른손 손톱 가장자리엔 아직 연두색 유화 물감이 스며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는 생애 처음인 이번 개인 전시회에 2년 전부터 틈틈이 그린 유화 28점을 내건다. '대중가수가 재미로 한 소일거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에게 그림은 때로는 지난 시절 아픈 기억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배출구였고, 때로는 그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 치료약이었다.

'신토불이' '장모님' '99.9' 등의 히트곡을 갖고 있는 배씨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2003년 무렵. 당시 그는 5~6년째 그를 괴롭히던 메니에르 증후군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갑자기 주변 사물들이 마치 캔이 찌그러지듯이 우그러지면서 절 조여오는 거예요. 천장이 내려앉고 사물이 뒤틀려 보이고요. '그 느낌을 추상화로 그리면 뭔가 작품이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일상 자체가 비현실적이었어요."

현기증과 메스꺼움보다 더 괴로웠던 건 가수에게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귀울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힘닿는 데까지 공연장과 무대를 찾았다. 가난 탓에 고생하며 컸던 자신과는 180도 다른, 유복한 환경에서 곱게 자란 아내(손귀예)를 고생시킬 수 없다는 책임감에서였다. "결혼할 때 처가에서 심하게 반대했어요. 보란 듯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며 몸을 혹사했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쌓였던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의 피로는 급기야 의처증으로까지 진전됐다.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던 그가 선택한 것이 그림이었다. "아내가 유화 화가니까 그냥 어깨너머로 배운 걸 따라 하는 수준이었죠. 그런데 희한하게 붓을 들면 마음이 진정됐어요. 캔버스에 밤새워 색칠을 하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기 일쑤였죠. 잡념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음악으로도, 바둑(5단)으로도 얻지 못한 위안이었다.

그는 '무엇을 그려야지'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붓을 잡는다고 했다. 고향인 충남 논산의 시골 풍경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릴 때도 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응어리를 화폭에 풀어놓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가 술과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는 바람에 그가 학교를 그만두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했던 일, 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사지 못했던 일, 견디다 못해 어린 마음에 대통령에게 "우리 아버지 좀 잡아가세요"라는 편지를 쓴 일도 있었다.

"제가 그린 그림 중엔 어둡고 암울한 느낌이 많아요. 가끔 제 그림을 보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자란 사람은 이런 걸 그리지 않겠지'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속에 있는 어두운 부분이나 응어리가 그림을 통해 서서히 풀리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가정 형편 탓에 수업을 못 들을 때마다 먹을 갈아 혼자 글씨를 쓰며 외로움을 달랜 경험이 있는 그는 "전시회가 끝나면 당분간 서예에 미쳐볼 생각"이라 했다. "덕분에 지금은 마음이 아주 편해요. 올가을쯤엔 20번째 앨범도 낼 생각입니다. 제목은 안 정해졌는데, '오뚝이 인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넘어져도 힘들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인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