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외국 말단 외교관도 이병철 쉽게 만나, 지금은 어림도 없을 정도로 한국 위상 커졌죠"

지난 5일 주한 독일 대사관에선 직원 한 명을 위한 만찬회가 열렸다. 근속 40주년을 맞은 도필영 공보관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자리였다. 주한 외국 대사관에서 40년간, 그것도 '공보관'이라는 한 자리를 꾸준히 지켜온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한스 울리히 자이트 독일 대사는 이날 도씨에게 외교부가 제작한 40년 근속 기념 메달을 전달하며, 이달 말 65세 정년을 맞아 은퇴해야 하는 그에게 "1년만 더 일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도씨는 이 부탁을 받아들여 '독일 알리미' 역할을 1년간 연장하게 됐다.

6일 기자를 만난 도씨는 독일 관련 홍보 멘트로 첫 인사를 건넸다. "1972년 한·독 교역량은 1억8000만달러, 작년엔 265억달러였어요. 30년 만에 150배 늘어났죠. 하지만 독일에 대한 국민 관심도나 정치·문화 교류는 그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국내 철강회사에서 일하던 20대 시절, 독일은 그에게 그저 낯선 유럽 국가에 불과했다. 퇴근시간도 주말도 없이 일하면서 슬슬 회의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지인(知人)이 독일대사관 취업을 권했다. 주5일 근무와 높은 봉급에 반해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한 것이 40년 근속의 첫 단추였다. 그 후 지금까지 10명의 독일 대사, 수많은 독일인 외교관들과 직접 부대끼며 독일을 배웠다.

"한국과 독일의 관계는 의외로 끈끈하고 뿌리가 깊습니다. 6·25전쟁 직후부터 1958년까지 부산 '독일 적십자병원'에선 독일인 의사들이 한국인 환자 27만명을 치료했어요. 당시 독일 의료진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그들에게서 의술을 배웠던 한국인 의사들은 2010년 70·80대 노인이 돼 다시 만났죠. 가슴 뭉클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통일이 되자, 통일 독일에서 분단의 해법을 찾으려는 한국 언론은 앞다퉈 독일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그는 현지 취재 보조와 섭외를 전담했다. "1993년 한국을 방문한 독일 헬무트 콜 총리는 오자마자 판문점으로 달려갔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앞에 서서 '통일 독일 총리로서 한국의 통일을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연설했지요. 같은 아픔을 겪어서인지 진심으로 우리 현실을 공감하고 통일을 응원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과 한국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겪은 소소한 회고담도 많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던 1978년, 독일 공영방송에서 중계권을 받아 국내 방송사를 통해 중계했다. 당시 16㎜ 흑백 필름을 대사관에서 먼저 돌려보며 그와 독일인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차붐!"을 소리 높여 외쳤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을 방문한 당시 헤르초크 대통령은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고 감탄하며 꼬치꼬치 질문하기도 했다.

40년간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한국을 대하는 독일 외교관들 태도도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1974~75년 한국서 상무관으로 근무했던 80대 독일인과 지금도 연락하는데 그가 최근 '그때는 말단 외교관 직급으로도 고(故) 정주영·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웬만한 기업인을 쉽게 만났는데 지금은 격세지감'이라며 웃더군요."

"독일인을 원칙만 따지는 딱딱한 사람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정 많고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거듭 강조한 그는 아직도 독일에 대해 홍보하고 싶은 게 많다. "2003년 사민당 슈뢰더 총리는 노동·사회 개혁법인 '어젠다 2010'을 밀어붙이다 낙선했지요. 그 후 보수여당 출신 메르켈 현 총리가 그 법을 강화해 독일 경제를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당을 초월해 국익을 위하는 정치, 작은 일도 대충하지 않는 독일식 책임의식은 꼭 배웠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