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경제 모처럼 '청신호'… 청년 실업·소비 부진은 여전히 숙제

지난 4년 동안 한파에 시달리던 미국 경제에 모처럼 훈풍이 불고 있다. 산업생산을 포함한 일부 실물 경기 지표가 개선되고 있고, 증권 시장에서도 활기가 엿보인다.

제조업 생산이 늘어나고 있고, 실물 경기의 회복세를 반영해 증시도 호조세다. 다우존스 지수는 2008년 금융위기 전(前) 1만3000포인트대에서 위기 당시 6500으로 급락했으나, 최근에는 다시 위기 전 수준까지 근접했다.

미국의 경기 회복 기대감을 더욱 높여주는 것은 고용 사정의 극적인 개선이다. 실업률은 금융위기 이후 10%대까지 급등한 뒤 9%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작년 10월부터 하락해 올 1월과 2월에는 8.3%로 내려갔다. 2009년 1월 이후 36개월 만의 최저치다. 이 같은 신호를 과연 경기 회복의 전조로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미국 현장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더딘 민간 소비, 원기 회복 안 돼

미국 경제가 오랜 투병 끝에 점차 원기를 회복하는 듯하지만, 예전처럼 강한 체력과 활력을 되찾기에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미국 경제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민간 소비가 좀처럼 늘지 않고 있다. 민간 소비 증가율은 작년 4분기에 전기 대비 연 2.0%를 기록했다. 2009년 말부터 시작된 민간 소비 하락세가 작년 2분기를 바닥으로 점차 상승 기조로 돌아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초 시장의 기대치인 2.4%보다 낮을 뿐만 아니라 과거와 달리 경제성장률을 밑도는 수치다. 미국의 최대 소비철인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과 같은 연말 특수가 포함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작년 4분기 소비 증가는 의미가 더욱 퇴색된다.

올 들어서도 소비 증가세는 다른 지표들에 비해 미약하다. 주요 소비 품목인 내구재 주문은 연초에 오히려 4%나 감소해 3년 만에 가장 크게 축소됐다.

미국의 민간 소비 전망이 어두운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자산 소득의 주요 부문인 부동산 시장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주택 가격은 금융 위기 이후 급속히 하락해 작년 말 기준으로 위기 직전의 최고가 대비 33%가 하락한 상태다. 집값은 작년 연말 이후에도 계속 내려갔다. 금융위기 전에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집을 산 대다수가 아직도 집값보다 더 많은 빚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소비 부진은 기업들이 경기 회복 기대를 안고 크게 늘려 놓은 재고 소진을 어렵게 만들어 생산을 위축시킬 수 있다.

◇고용 개선은 착시효과… 실업률 하락은 구직 포기자 증가 때문

백악관조차 놀랄 정도로 나아지고 있는 고용 사정도 깊이 들여다보면 빠른 소비 회복과 경기 활성화에 큰 도움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일단 실업률 하락 정도가 그다지 크지 않다. 금융위기 전 4~5% 수준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고용 지표의 착시 현상도 존재한다. 실업률 하락은 신규 취업자 증가뿐 아니라 취업 포기자가 늘어난 영향도 크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경기 침체로 구직 포기자가 늘어 경제활동 참가율이 떨어지고 있고, 고용률도 여전히 낮다.

실업의 질(質)도 악성이다. 실직 후 6개월 이상 재취업이 안 되는 장기 실업자 수가 600만명을 넘어 전체 실업자의 40%를 웃돈다. 과거 대공황 시절과 유사한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청년 실업 문제도 심각하다. 아이비리그 명문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얻는 데 최소 1~2년은 걸린다. 고용이 점차 늘어나지만, 실질 임금 수준은 낮은 임금 상승 등으로 인해 금융위기 이전보다 훨씬 낮아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노동시장 양극화로 계층 간 소득격차 확대

산업 구조의 고도화로 인한 노동 수급의 불일치도 미국 경제의 커다란 고민거리다. 건설업·제조업·도소매업처럼 저학력의 단순 반복업무 위주 업종에는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는 데 반해 교육·의료서비스와 같은 고학력의 전문직에는 사람 구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 같은 노동 수급 구조의 양극화는 미국 사회의 계층 간 소득 격차를 확대하고, 내수 부진과 체감 경기 악화의 또 다른 요인이 되고 있다.

부동산 가격 하락과 고용 불안 영향으로 미국의 소비 시장은 곳곳에서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 정부기관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 같은 각종 세계기구가 밀집해 있는 워싱턴DC는 다른 지역에 비해 고용 사정이 좋은데도 도심 상가에는 폐업 처분하는 점포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미국 기업들의 세계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기업 실적이 미국 내 고용이나 내수 증가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 문제점도 있다. 미국의 또 다른 주가지수인 S&P500에 포함된 대기업의 수익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 3년간 6%에서 9%로 상승했지만, 이 수익 중 외국에서 얻은 비율이 2000년 이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미국 기업이 제공하는 일자리의 상당수가 외국 근로자들에게 돌아가는 셈이다.

◇재정 적자는 미국 체력 강화에 걸림돌

미국 정부의 재정 악화도 미국 경제의 체력 강화에 발목을 잡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서민 경기 활성화 등을 목적으로 9000억달러에 달하는 2013년 회계연도의 적자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로 인해 국가 부채가 1조달러 이상 늘어난다는 점에서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대외 경제 여건이 악화되는 점도 큰 부담이다. 유로 경제권의 재정 악화 지속, 중동 정세 불안에 의한 국제 유가 폭등은 미국 경제의 회생 노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앞으로 경기 회복 상황은 올 연말 미국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가운데 고용 상황이 대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도 있다. 현재 실업률이 낮아지는 것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업률이 떨어져 경기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 실업자들이 구직 전선에 속속 들어서게 돼 오히려 연말에는 다시 실업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계산이 그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재집권을 위해서라도 경기 활성화에 최선을 다할 텐데, 이 같은 노력이 대내외적인 제약 요인과 불확실성 속에서 얼마나 결실을 거둘지가 향후 미국 경기를 바라보는 최대 관전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