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천 점심 워킹족 넘실… "같이 걸을까?"

"부장님, 이렇게 좋은데 이참에 주말 야유회도 아예 양재천으로 잡으시죠."

15일 오후 12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 뒤쪽 양재천변(邊). 삼성엔지니어링 신입사원 이희윤(27)씨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는 민경배(49) 부장에게 불쑥 물었다. "나 원 참 자네도. 주말까지 부원들 보고 싶나?" 함께 걷던 부서원 10명 박장대소가 터졌다.

봄이 오면서 양재천은 '상춘객(賞春客)'들로 만원이다. 민 부장처럼 근처에 직장이 있어 점심을 간단히 먹고 나와 30~40분씩 이 길을 걷는 '점심 워킹족'도 바글바글하다.

민 부장은 사내에서 소문난 '양재천 광(狂)'. 타워팰리스 근처 영동 2교에서 학여울역 부근 영동 6교까지 왕복 5.5㎞거리를 정장차림으로 걸어 다녔다. 점심시간을 틈타 양재천을 걸어 지난해 체중 6㎏을 빼기도 했다. 삼성엔지니어링 전체 2000여명 직원 중 민 부장처럼 '점심 워킹족'은 거의 절반에 달한다는 게 직원들 귀띔. 이 일대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다.

도곡동 오피스텔 관리 회사에 다니는 강호일(52)씨는 점심때 날씨가 좋으면 회사에 놓아둔 자전거를 끌고 나와 양재천을 달린다.

이어폰을 끼고 나와 따스한 햇볕을 맞으며 일본어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기도 한다. 강씨는 "시간 내서 굳이 등산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운동하면 충분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양재천은 과천에서 시작해 탄천과 합류하기까지 16.6㎞ 길이 냇물을 가리킨다. 인근 고층 빌딩과 아파트 생활하수가 쏟아져 '죽음의 하천'으로 불렸다. 파리가 들끓고 고약한 냄새가 났으며, 우범지역으로 알려져 주민들이 접근하길 꺼렸던 곳이었다.

1995년 서초구와 강남구가 하천 복원 사업에 나섰고, 생명이 살 수 없는 5급수 판정을 받았던 양재천은 6년간의 사업 끝에 10여종의 물고기가 살 수 있는 2급수가 됐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수풀이 우거지자 먼저 주민들이 찾기 시작했고, 인근 직장인들도 천(川) 점령 대열에 합류했다. 평소 새의 지저귐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리는 양재천은 점심때가 되면 직장인들로 왁자지껄해진다. 일 이야기, 직장 상사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오가며 아직은 앙상한 가로수 사이를 가득 채운다. 이제 양재천은 직장인들의 '메카'가 됐다.

강남구가 실시한 '2011 강남구사회조사'에 따르면 낮 동안 양재천 영동 4교 구간을 지나는 1시간 보행자 수는 평균 2900여명.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심 한가운데의 청계천이 3400여명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다. 구 하천관리팀 임승민 주임은 "양재천은 원래 아침·저녁 시간대 주민 이용률이 높았으나, 최근 회사원들의 합류로 점심시간대 유동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천변의 각종 시설도 직장인들을 끌어들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대치동 대치교 인근 유-헬스센터에는 간호사와 영양사, 운동사가 상주해 행인들의 운동 상태를 무료로 검사해주고 있다. 강남보건소 관계자는 "최근 들어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며 "10명 중 3명은 점심때나 출·퇴근 시간에 운동 삼아 양재천을 걷다 들르는 인근 직장인"이라고 했다. 타워팰리스 옆 대치동 아파트 단지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늘벗공원'과 '인공암벽'도 숨겨진 명소로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영동 1교에서 6교 사이 4km에 이르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길도 사랑받고 있다. 20~30m 높이로 우뚝 솟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한편에는 카페거리가 조성돼 있는데, 창문에 형형색색의 화분을 걸어놓은 테라스 카페에는 봄기운에 취한 직장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영동 1교와 2교 사이 '와인거리'에서는 퇴근 후 정취를 즐기며 와인 한잔을 기울일 만한 곳도 많다.

양재천 주변 직장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곳으로 양재 시민의 숲과 문화예술공원도 빼놓을 수 없다. 문화예술공원은 메타세쿼이아 나무 길과 그 사이 잔디밭으로 소문을 타고 있다. 메타세쿼이아 나무 사이로 난 오솔길은 호젓해 외국 숲에라도 들어온 기분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당 단풍, 칠엽수, 잣나무 등 40여종 9만4800주의 나무가 있는 시민의 숲도 직장인의 메카 양재천의 한 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