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건축가 故정기용 그의 신념·열정 묵묵히 담아내

전북 무주의 한 주민자치센터 앞에 옹기종기 모인 촌부(村婦)들이 이곳에 들어선 '1000원만 내면 되는 공중목욕탕'에 대해 자랑한다. "누가 이 목욕탕을 지었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고개를 젓는다. 주민자치센터와 공중목욕탕을 설계한 건축가 고(故) 정기용(1945~2011)은 이들 사이에서 묵묵히 앉아있을 뿐이다.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정재은 감독·8일 개봉)는 2009년 말부터 2011년 3월까지 정기용의 행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다큐는 2005년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정기용이 건축전시회를 준비하는 부분과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들을 돌아보는 부분이 두 축을 이룬다. 투병 중에도 설계에, 강의에, 글쓰기에 전시까지 하는 그를 가리켜 정기용의 지인 승효상(건축가·이로재 대표)은 "5년간 50년의 삶을 압축해서 살았다"고 했다.

카메라에 담긴 그의 작품들은 지방 소도시에 있는 공공건축이 대부분이다. 정기용은 96년부터 2006년까지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해 마을회관·주민자치센터·군청·공설납골당·버스정류장 등을 설계했다. 순천·진해·제주·서귀포·정읍·김해 등에 어린이를 위한 '기적의 도서관'도 세웠다. 이처럼 그는 남을 위한 건축을 많이 했지만 정작 자신은 서울 명륜동 다세대 주택에 세들어 살았다. 영화에선 정기용이 10평(33㎡) 남짓한 자택 거실 소파에 앉아 "이 집의 좋은 점 하나는 경관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할 때 밖에서 트럭 행상의 확성기 소리가 들리는 장면이 나온다.

정기용은 1970년대 초 서울대 미대·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에 건너가 건축을 공부했다. "미술로는 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힘들고, 건축으론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파리에 가서 느낀 것 같다. 그는 건축이 삶을 바꾸는 데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승효상)

이 다큐는 대중에게 낯선 인물과 주제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개봉 열흘 만에 8700여명의 관객을 모아 화제다. 정기용이나 건축에 대해 모르거나 관심이 없더라도 한국이란 '공간'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점이 관객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평이다.

'고양이를 부탁해' 등을 연출했던 여성 감독 정재은(43)은 정기용의 병세에 대한 연민도, 그의 작품에 대한 경탄도 내비치지 않는다. 영화에는 승효상·유걸·김봉렬 등 정기용과 친분이 있었던 건축가들과 비평가들도 등장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정기용 설계의 단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처럼 카메라가 정기용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하지 않은 것은 장점이지만, 정기용이 생전 '사람을 위한 건축' 때문에 사회와 겪었을 마찰이나 갈등 등을 좀 더 치열하게 다루지 않은 점은 아쉽다.

'말하는 건축가'란 제목은 어떤 의미일까. 승효상은 "인문학을 이해하는 건축가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무리와 사건에 대해서는 언제나 분노했습니다. 인문학적 사유(思惟)에서 시작한 그의 건축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