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를 길러낸 남자 vs. 천재로 기록된 여자

일찍 꽃피진 못했으나 꾸준했고, 걸출한 제자들을 길러낸 남자 vs. 요절한 천재 여성작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와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나란히 열리고 있는 마이클 크레이그-마틴(Craig-Martin·71)전과 에바 헤세(Hesse·1936~1970)전은 작품 못지않게 예일대 출신 두 작가의 삶을 대비하며 볼 만한 전시다.

◇'허스트의 스승' 크레이그-마틴

"내 전성기는 지금이다."

71세의 마이클 크레이그-마틴에게는 언제나 '데미안 허스트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아일랜드 출신인 그는 예일대 졸업 후인 1960년대 말 영국으로 돌아가 런던의 미술 명문 골드스미스 컬리지에서 20여년간 교편을 잡았다. "아트(art)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의 강의는 데미안 허스트, 트레이시 에민, 줄리안 오피 등 현재 영국 미술계의 주축인 yBa

(young British artists) 그룹을 길러낸 산실(産室)이 됐다.

학생 때 크레이그-마틴의 개념미술 작품 '떡갈나무'(1973)를 가리켜 "선생님의 작품이 제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라고 했던 데미안 허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존 작가'로 발돋움했으니 그야말로 청출어람(靑出於藍).

최근 방한한 크레이그-마틴은 "제자들이 당신보다 더 잘나가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 "언제나 그들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젊었을 때 한 실수를 제자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나 같은 스승을 뒀으니 그들은 운이 좋은 셈"이라고 재치있게 답했다.

크레이그-마틴은 1960~70년대엔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설치작품을 주로 선보였고, 1980년대 이후 색(色)으로 관심을 전환해 신발, 전구, 옷걸이 등 일상적인 사물의 색채를 부각시킨 회화를 발표했다.

이번 전시작은 단어와 그 단어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조합한 2008년 이후 작품. 'play(경기)'와 축구공을, 'hope(희망)'와 지구의를, 'idea(아이디어)'와 서랍을 결합시켜 강렬하고 화사한 색채로 표현하는 식이다. 크레이그-마틴은 "사전에는 수천 단어가 수록돼 있지만 사람이 실제로 사용하는 단어는 극히 제한적이다. 이미지의 세계에서 그 단어들은 저마다 다양한 색채와 형태로 표상된다.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요절한 천재 에바 헤세

"나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끊임없이 작업하고 있다. 작업하기에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1964년, 28세의 에바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 헤세의 어린 시절은 불운으로 점철됐다.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떠돌이 생활을 했다. 1939년 뉴욕에 정착했지만 부모의 이혼과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의 자살이 이어졌다. 유년기의 고난은 그에게 평생 극심한 두려움과 불안을 안겨줬고, 그는 더욱 작업에 몰두하며 이겨냈다.

헤세는 예일대를 졸업한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65년엔 라텍스, 유리섬유 등 기존 조각가들이 사용하지 않던 '부드러운 소재'를 이용, 독창적인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물성(物性)의 헤세 작품은 그에게 '포스트-미니멀리즘 작가'라는 호칭을 안겨줬다. 단 10년간 작업했지만 헤세의 작품은 이후 루이즈 부르주아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줬다.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 또한 그의 인기에 한몫했다. 그러나 미인박명(美人薄命). 헤세는 34세에 뇌종양으로 삶을 마감했고, 미술사의 신화(神話)가 됐다.

이번 국제갤러리 전시에는 헤세의 초기 작품인 회화 20점과 실험적 소품 15점이 나왔다. 빌럼 데 쿠닝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적 회화의 기괴한 인간 형상은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다.

▲마이클 크레이그-마틴, 'Word·Image·Desire', 4월 29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신관, (02)2287-3500

▲에바 헤세, 'Spectres and Studiowork', 4월 7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02)735-8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