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R&D(연구·개발) 바람 부는데… 농고·농대는 점점 줄어

"농업이 사양산업이라고요? 농업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지요. 요즘은 최신 영농 기법이나 과학 지식을 모르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전북 순창과 김제에서 파프리카 농장을 운영하는 박문신씨는 '농업은 첨단산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파프리카 재배는 일조량(日照量)과의 싸움이다. 일조량을 1% 높이면 수확량이 1%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4000평 규모인 박씨의 온실은 일조량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적용됐다. 온실 기둥은 채소에 드리우는 그늘 면적을 줄이기 위해 굵기는 가늘면서 강도는 높은 소재를 사용했다. 또 아침에 온실 내부에 맺히는 이슬이 햇볕을 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내부 습도도 잘 조절해야 한다. 온실 내부 온도와 습도는 물론, 식물 광합성(光合成)에 중요한 이산화탄소 농도는 컴퓨터로 자동 제어된다. 온실 곳곳에 설치된 센서(감지기)가 중앙 컴퓨터에 신호를 보내면, 컴퓨터가 보일러·분무기를 알아서 켜고 끄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자동으로 조절한다.

◇ "한중FTA 파고도 넘을 수 있어"

경기도 이천에서 아내와 함께 표고버섯 농장을 운영 중인 조해석(34)씨는 요즘 버섯 재배와 관련한 특허 출원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는 원래 모 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지만,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중퇴한 뒤 한국농수산대학에 입학했다. 충남 부여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은 "농사는 몸만 고달프고 벌어먹기 힘들다"면서 극력 만류했다. 하지만 아들은 "농업이라는 '블루오션'(성장성이 높은 미개척 시장)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말했다.

2004년 처가가 있는 이천에 표고버섯 농장을 세운 조씨는 지난해 버섯으로만 5억원대 소득을 올려 부농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버섯 특허 개발에 나선 것은 언젠가 체결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이다. FTA로 값싼 중국산 표고버섯이 물밀듯 밀려올 것에 대비하려면 재배 단가를 낮추는 자동화 기술 개발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농촌이 어렵다 어렵다'고 말하지만 지금이 꿈을 키우는 시기도 될 수 있다"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선 스스로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젊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농촌에 연구·개발(R&D) 바람이 불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국 영농법인에 설립된, 연구·개발을 위한 시험장은 2001년 198곳이던 것이 2010년엔 323곳으로 늘어났다. 정부가 아니라 민간 자체적으로 만든 농업 R&D 센터다. 연구소 등의 연구·개발 결과를 영농에 활용하는 농가 수는 2002년 4만7389가구에 불과했으나, 2009년에는 11만2564가구로 매년 9000가구씩 늘어나고 있다.

◇"농업은 1차 산업이 아닌 4차 산업"

농업은 흘러간 1차 산업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4차 산업이 될 수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농업은 우주 산업이나 나노 공학과 같이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정의했고, 일본은 "농업이 일본을 구한다"는 구호 아래 신(新)농업을 부활의 돌파구로 보고 있다. 열쇠는 R&D에 있다.

과거엔 생산량 극대화가 농업의 최우선 과제였지만, 지금은 '삶의 질'이 향상돼 다양한 농작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R&D가 강조되는 이유다. 성진근 충북대 명예교수는 "농산물 시장도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자 수요가 다양해지는 매스티지(대중적인 명품) 시장으로 진화하고 있다"면서 "이런 소비자의 다양한 수요에 맞추기 위해 연구·개발에 힘쓰다 보면 농업이 IT(정보기술)에 버금가는 최첨단 성장산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라지는 농고ㆍ농대

농업을 첨단 산업으로 키워야 하는 이유는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지만, 이를 만들어갈 첨단 인력 육성 시스템은 부족하다는 것이 오늘 우리 농업이 안고 있는 큰 문제의 하나다. 귀농 희망자가 늘어나고, 농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젊은층이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을 농업 전문가로 육성할 교육 기관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 130개에 달하던 농업계 고교는 1990년대 이후 하나 둘 줄어 지금은 80%가 사라져 23곳만 남아 있다.농과 과정이 개설된 종합고가 있지만, 그것도 45개에 불과하다. 현재 20개 남짓 남아 있는 농과대학은 생명공학 등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오히려 농업 관련 색채를 희석시키려 애쓰고 있다. 많은 농대들이 '생명과학대학'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농업을 전면에 내세우면 신입생 모집이나 졸업생의 취업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마상진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업에 미래를 걸고 싶은 사람조차 농업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 1997년 한국농수산대학을 설립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대학 졸업생 중 상당수가 억대 수입을 올리는 등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정원이 적어 농촌 전체적으로 R&D 기반을 만드는 데는 아직 한계가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