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우 교수의 경영 수필] 美 전자유통업체에 무시당했던 삼성, 관계 계량화 전략으로 거래처 다변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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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당시 필자는 미국 내 삼성전자 가전 영업을 책임지게 됐다. 업무 파악이 끝나자마자 임원들과 서킷시티(Circuit City)를 방문했다.

그 당시 회사의 거래선은 지역의 소규모 영세업자나 할인점 위주였으며, 전문점은 베스트바이(Best Buy) 한 곳뿐이었다. 또 다른 전문점인 서킷시티 개척을 통한 거래선 다변화는 해묵은 숙제였다. 서킷시티는 2009년 파산하지만, 1998년 당시만 해도 미국 최대의 전자유통업체였으며, 미국 시장에서 서킷시티와 거래를 않고서는 주류 전자업체가 될 수 없었다.

서킷시티는 우리를 만나는 줬지만, 단지 TV 바이어 한 명뿐이었으며, 그것도 30분 남짓 우리 회사를 소개할 시간을 허락했을 뿐이었다. 필자의 설명이 끝나자 그 바이어는 귀찮은 듯 말했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 이 세상에 당신네들만 있는 제품이 있거나 세상에서 제일 싼 제품이 있지 않으면 앞으로 다시 오지도 마라." 우리 일행은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분노의 각오를 다졌다. "우리도 그들이 오라고 할 때까지 그들에게 가지 않겠다. 그러나 3년 안에 반드시 우리를 오라고 하도록 만들자.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경쟁사인 베스트바이가 우리와 거래해서 큰돈을 버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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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후 본사 감사팀이 방문했다. "당신이 취임할 때 베스트바이와의 거래 비중을 줄이라고 특별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는데, 당신이 책임자가 되고 나서 오히려 베스트바이의 비중이 더 늘고 있어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위험하다는 속담도 모릅니까?"

"네, 한 바구니에 담는 건 위험하지요. 그런데 계란을 계란 전용 냉장고에 넣으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킷시티와의 현안을 고려할 때 베스트바이를 계란 냉장고로 만드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계란은 계란 전용 냉장고에서 훨씬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겠지요."

며칠 후에 서울로부터 감사받는 태도가 불량했다는 주의를 받았지만, 베스트바이를 '계란 전용 냉장고'로 만들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이미 시작됐다. 베스트바이의 담당 임원에게 본사의 우려와 '계란 전용 냉장고'로 표현된 우리의 기대를 함께 전했을 때 베스트바이 임원은 자기들에게 그런 신뢰를 주는 삼성전자 미국법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미국 내 유통전략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가 내린 결정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현재 여러 거래선들과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계량화해서 조직 구성원들끼리 공유하기로 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하기도 어려운 '관계'라는 변수를 측정해 보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거래선과의 관계를 정도에 따라 0에서 5까지 나누어 보았다. 현재 거래가 없으면 '관계 0'이고, 한두 번 거래조건이 맞아서 거래했으면 '관계 1'이며, 한두 개의 제품이라도 지속적으로 거래하는 거래선은 '관계 2'이다. 나아가 여러 제품을 지속적으로 거래하며 매출 비중이 큰 거래선은 '관계 3', 경영진들 간에 교류하며 중장기 계획을 가져가는 정도가 되면 '관계 4', 전략적 제휴의 단계에 이르러 서로 투자를 할 정도가 되면 '관계 5'이다.

현지법인 직원들은 이 기준에 따라 머리를 맞대고 거래선과의 관계를 수치로 측정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목표도 함께 세웠다. 예를 들어 당시 서킷시티와의 관계는 '관계 0'이었는데, 3년 후에 '관계 3'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는 식이었다. 이렇게 조직의 모든 구성원이 현재 상황과 목표를 측정 가능한 수치로 공유하면서 현지 유통 채널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니 일이 훨씬 효과적으로 진전됐고, 본사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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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우리의 노력이 성과를 냈는지 2년 후인 1999년 12월, 서킷시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다음달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전자제품전시회(CES) 첫날 아침, 자기네들 방으로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토록 절치부심하며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하지만 흥분하는 담당 임원에게 이렇게 회신하라고 했다. "아직 우리는 당신들을 만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제품을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직 없고, 세상에서 가장 싼 제품도 아직 없다."

며칠 후 우리는 2년 전 우리에게 막말을 했던 바이어의 한참 위 상관으로부터 감회 가득한 사과를 받으며, 라스베이거스에서 자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서킷시티 경영진의 서울 방문이 이뤄졌고 첫 거래가 시작됐다. 이로써 미국 진출 20여년 만에 서킷시티에 삼성브랜드를 입점시키며 '관계 0'에서 '관계 4'로 바로 진입하는 성과를 맛봤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편집장이었던 조안 마그레타(Joan Magretta)는 저서 '경영이란 무엇인가(What Management Is)'에서 "경영자들이 조직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고 성과 측정 도구를 미리 제시해 무엇을 달성하면 그 목표가 이뤄지는 것인지를 알려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 조직이 점점 커지고 의사 결정이 복잡해질수록 조직 구성원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공유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