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TV 독과점 시장 흔들… 라면 10년 담합 구조에 철퇴

'반값 TV' 열린 시장이 이겼다
삼성·LG가 TV시장 98% 장악, 밉보인 유통업체는 불이익 줘
반값 TV 출시날 두 업체서 찾아와 장려금 주며 자사제품 값 인하 요청

지난 16일 한 전자 전문점 TV담당 바이어에게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영업 담당자가 연달아 찾아왔다. 그날은 이마트가 TG삼보컴퓨터와 공동 기획해 76만9000원짜리 42형(인치) LED TV를 출시한 날이었다. 시장에서는 120만원대에 달하는 삼성·LG 제품과 큰 차이가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전자업체 영업 담당자는 "판매 장려금을 모델별로 10% 내외 지급할 테니 매장 판매 가격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판매 장려금'이란 제조업체가 유통업체에 지급하는 일종의 마진이다. 유통업체가 TV를 팔아 남기는 마진은 5% 내외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국내 TV 시장은 삼성과 LG가 98.2%(업계 추산)를 장악한 대표적인 독과점 시장이다. 국내 중소업체와 수입 TV를 다 합쳐도 1.8%에 지나지 않으니, 삼성과 LG가 정하면 그게 곧 가격인 시장이다. 유통업체 바이어는 "삼성·LG 측에서 먼저 찾아와 가격을 낮춰달라고 한 건 희귀한 일"이라며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튿날부터 삼성과 LG의 TV 가격도 최대 14%까지 내려갔다. 이 때문에 저가(低價)TV와 삼성·LG 제품의 가격 차이는 40만원대에서 20만원대로 줄어들었고, 삼성과 LG는 어느 정도 시장을 방어할 수 있었다.

G마켓, 이마트 등 온·오프라인의 유통업체가 '반값 TV'를 연이어 내놓으면서 독과점 업체들로 쏠려 있던 힘의 불균형이 깨지고 있다. 전자업계의 두 '공룡'인 삼성과 LG가 중소기업·유통업체 연합군에 굴복해 TV 가격을 내린 것은 '공정한 경쟁'이라는 자유 시장의 장점이 제대로 작동한 좋은 사례다. 시장 경쟁이 살아남으로써 대기업으로 쏠리던 높은 높은 이익이 소비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통업체들은 독과점도 문제지만 독과점 업체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한 전자전문 유통업체 임원은 "TV 시장에서 삼성·LG에 밉보이면 잘 팔리는 모델을 제대로 공급받지도 못하고 공급 조건에서도 손해를 보게 된다"며 "두 업체가 가격 경쟁도 제대로 하지 않을 뿐더러 거의 항상 공동보조를 취하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등을 돌리면 곧바로 팔 물건이 없어지게 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공룡'끼리 담합하고 있는 시장 구조가 문제라는 것이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TV나 자동차 등 수출 산업뿐 아니라 식품 같은 내수 산업에서도 두세 업체가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게 큰 문제"라며 "공정한 경쟁 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펴고 적극적인 감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면 업체에 소비자 지갑 털렸다
선두 업체가 가격 인상안 마련, 다른 업체에 알리면 따라오는 식
매년 소비자들 수천억원씩 손해… 농심 "가격 각자 결정… 협의 안해"

10년에 걸친 라면업체들의 가격 담합은 거의 모든 담합 수법이 동원된 종합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이호영 한양대 교수는 “이번 담합사건은 이론적으로도 매우 흥미있는 사례”라고 말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라면업체들의 담합은 무척 치밀하게 진행됐다. 시장의 70%를 점유하는 농심이 가격 인상안을 마련한 뒤 이를 다른 업체들에 알리면 순차적으로 따르는 식이다. 예를 들어 2008년 2월 20일 신라면이 650원에서 750원으로 가격을 올린 뒤 3월 1일 삼양라면이 그대로 올리고, 4월 1일엔 진라면과 왕라면이 따라갔다. 이런 일은 거의 매년 반복됐다.

공정위는 “인상 계획·내역·날짜뿐 아니라 인상 후 제품 생산날짜까지 협조해 담합을 진행했다”며 “매년 3월 말 열리는 라면협의회 정기총회와 간사회의가 합의의 창구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농심은 공정위의 담합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독자적으로 가격을 결정했으며 후발업체들과 가격 인상을 논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공식 반론을 내놨다. 농심의 가격 선도를 다른 업체들이 추종했을 뿐이란 해명이다. 하지만 조홍선 공정위 카르텔조사과장은 “라면은 소비자들이 가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탄력적인 상품이라 선두업체라 해서 마음대로 가격을 올리기 어렵다”며 “담합이 아니고선 10년간 6차례의 가격 인상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특히 공정위는 “3년 반의 조사 기간 동안 업체 담당자들의 이메일, 내부 회의록 등 증거를 확보했다”며 “가격 선도가 아닌 명백한 담합”이라고 주장했다.

담합 유지를 위해 보복 전략까지 구사됐다. 농심의 주도로 판매실적 및 목표, 영업지원책 등 정보를 교환하면서 담합 이탈자를 감시하다가, 가격을 올리지 않는 이탈자가 나올 것 같으면 최대 업체인 농심이 일정 기간 라면을 낮은 가격에 시장에 공급하는 보복 전략을 폈다. 이렇게 되면 담합 이탈자는 영업에 상당한 타격을 받기 때문에 확실한 징벌이 된다. 경제학 게임이론에도 나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다.

담합으로 라면회사들은 막대한 이득을 봤고, 소비자들은 그만큼 바가지를 썼다. 2001년과 2010년, 두 해를 비교하면 판매된 라면 개수는 37억3000만개와 37억2000만개로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가격 인상 덕분에 판매 금액은 1조2018억원에서 1조7782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거의 똑같은 개수를 판매했는데 라면회사들은 5700억원을 더 벌어들인 것이다.

공정위가 증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업계 2위인 삼양이 과징금을 감면받기 위해 자진신고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삼양은 116억원의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