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커피숍엔 절대 없다네, 茶房의 몽롱한 낭만

지금보다 세상이 훨씬 덜 세련됐던 시절 사람들은 다방(茶房)으로 갔다. 음악을 들으려 사람을 만나려 또는 홀로 일기 같은 걸 끄적거리려 그곳에 모였다.

다방은 말 그대로 살롱(salon)문화의 중심지였다. 갤러리였고 작업실이었으며 공연장이었다. 그 외의 시간엔 음악감상실이기도 했다. 그 안에 들어서면 세상은 다방 안과 다방 밖으로 격리되었다. 와이파이나 테이크아웃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다. 커피 한 잔은 이 방(房)의 몽롱한 기운에 취하는 것을 막는 각성제였다.

이제 다방은 없다. 외국어 상호를 외국어로 써놓은 커피 가게가 있을 뿐이다. 그나마 남은 다방에서는 짧은 치마에 다리가 덜 가려진 젊은 여자들이 한 손에 보온병, 다른 손에 스쿠터 핸들을 쥐고 부지런히 여관으로 커피를 나른다. 한국 다방사(茶房史)는 종지부를 찍기 직전인데도 아직 그 원형에 가까운 다방이 몇 남았다. 1950년대 문을 연 자리에서 지금도 사람들을 맞고 있는 한국 최고령 다방 세 곳을 찾아갔다.

진해 흑백다방 이중섭·유치환·서정주가 예술을 이야기했던…

◇진해 흑백다방―골다공증을 앓는 문화공간

진해 흑백다방은 화가 유택렬(1999년 작고)이 운영하다가 그 딸이자 피아니스트인 유경아(47)씨가 물려받아 애초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이다. 마산·창원·진해가 창원시로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된 이곳에 1955년 문을 열었다.

진해 중원로터리 근처 오래된 2층짜리 일본식 목조가옥 1층에 '시민문화공간 흑백' 간판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커피를 팔지 않는다. 대신 매월 첫째~셋째 토요일 연주회나 음악감상회가 열린다. 평일엔 다른 공연에 장소를 빌려주거나 유씨가 피아노 레슨을 한다. 그러나 진해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흑백다방'이라고 부른다. 최근 개봉한 변영주 감독 영화 '화차'에 이 다방 장면이 등장해 새로 화제가 됐다.

흑백다방은 애초 유택렬의 친구가 '칼멘'이라는 이름으로 열었다. 유택렬이 1962년 인수하면서 이름을 바꿨는데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의미로 '까치'라 하려다가 어감이 가볍다고 까치 이미지에서 흑백을 따왔다. 이중섭과 윤이상, 유치환, 서정주, 김춘수 같은 이들이 이곳에서 유택렬의 부인 이경승(1993년 작고)씨가 끓여 내오는 모카골드 원두커피를 마시며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흑백도 끝이라고 가족들은 말해왔어요. 그렇지만 정작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이곳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93년 진해시민회관이 생기기 전까지 진해의 모든 문화예술 공연은 이곳에서 열렸어요. 그 간판을 내리는 게 너무 죄송스러워서… 이렇게 눌러앉고 말았네요." 유씨가 '흑백의 자랑'인 모카골드 원두커피를 묽게 내려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흑백은 2008년 다방 영업을 마치고 폐업 신고했다. 그러자 시에서 '간판을 내리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된다'는 경고가 날아왔다. 흑백이 어떤 곳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진해시 공무원들의 야속한 말에 유씨는 간판을 떼어내면서 아버지 친필로 만든 간판의 '흑백'자를 오려 실내에 걸었다. 시민단체 '녹색창원21'의 도움으로 다시 '문화공간 흑백' 간판을 올린 것이 작년 12월이었다. "그때 간판 올린 기념으로 길놀이도 떠들썩하게 하고 하우스 콘서트로 크게 열었지요."

흑백다방 건물 2층에서 혼자 살고 있는 유씨는 아버지의 그림 700여점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그녀의 바람은 이 공간을 '유택렬기념관'으로 만들어 1층은 문화공간, 2층은 갤러리로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쉬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시에서 이 건물을 인수해 아버지 기념관으로 보존해 주면 아무 말 없이 집을 비우겠다고 했는데, 시에서는 '일단 시에 넘기고 신경 끄라'며 보상금 규모와 내역만 알려주더군요. 그래서 그 꿈을 접었습니다."

시인 김승강은 시 '흑백다방'에서 "그 다방은 치통을 앓듯, 관절염을 앓듯 신음소리를 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면 골다공증을 앓고 있을/ 정겨운 이름 흑백다방"이라고 읊었다. 100년 가까운 목조 건물 흑백다방은 화가 아버지와 음악가 딸의 힘겨운 근력(筋力)으로 하루하루를 맞고 있었다.

전주 삼양다방 TV엔 뉴스, 테이블엔 신문… 노인들의 사랑방

◇전주 삼양다방―60년을 한곳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이름난 전주 경원동 '왱이집' 근처에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찻집 삼양다방이 있다. 왱이집이 다 수용 못하는 손님들을 차지하려는 콩나물국밥 집들이 다방을 에워싸듯 포진해 있었다. 이 다방은 1952년 이 자리에서 개업해 현존 국내 최고(最古)의 다방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다방은 현재 이춘자(62)씨가 1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종업원 없이 이씨 혼자 모든 일을 한다. 아침 8시30분이면 문을 열고 오후 6시엔 문을 닫는다. 주로 마실 나온 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다보니 저녁엔 손님이 없기 때문이다. '레지'도 없고 배달도 안 하지만 동네 다방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씨 이전에 40년가량 한 사람이 운영했다고도 하지만 정확히 몇명의 주인이 이 다방을 거쳐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수십년 단골손님들은 이곳이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던 전주의 문화공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 이씨는 아침에 나오면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구독하는 신문 네 가지를 스테이플러로 고정해 단골들이 주로 앉는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김장 담글 때 쓰는 스테인리스 함지에 물을 넣어 가스불 위에 올려놓고 흰색 사기 커피잔을 그 안에서 데운다. 다방 중앙에 있는 브라운관 TV는 뉴스 채널을 틀어놓는다.

오전 9시쯤이면 첫 손님이 온다. 매일 오는 사람들이다. 커피값 2000원을 이들에게는 1000원만 받는다. 이씨는 "팔십 넘은 분들께 어떻게 커피값을 다 받겠느냐"고 했다. 11시쯤엔 제법 동네 어른들이 모이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간간이 문을 밀고 들어선다.

쌍화차를 주문하니 잣이며 호두, 대추를 듬뿍 넣은 차가 나왔다. 마시기 전에 사진을 찍자 이씨가 "옛날에는 거기에 달걀노른자를 넣어 마셨다"며 달걀을 깨 넣어주었다. 1960년대부터 이 다방을 다녔다는 김동만(75)씨는 "이곳 단골은 아침 먹고 나와 점심시간까지 앉아 있는 부류와 점심 먹고 차 마시러 나오는 부류로 나뉜다"며 "나이 먹은 사람들이 시내에서 갈 데가 별로 없어 7~8년 전부터 매일 나오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삼양다방도 예전에는 전주의 화가와 문인들이 모여 차를 마시던 곳이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지역 화가들이 그린 그림과 서예가들이 쓴 글씨가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최근에도 지역 화가들이 이곳에서 그림 전시회를 열 만큼 지역 문화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 학림다방 김지하 "이곳은 내 청춘의 쓰라림이자 로망스"

◇서울 학림다방―학생운동 산실에서 커피전문점으로

시인 김지하는 '학림(學林) 시절은 내겐 잃어버린 사랑과 실패한 혁명의 쓰라린 후유증, 그러나 로망스였다'고 기록했다. 1956년 서울 대학로에 문을 연 학림은 서울대 문리대가 다방 건너편에 있던 시절 '문리대 제25 강의실'이라고 불릴 만큼 서울대생들의 사랑을 받은 곳이다. 처음 문을 연 장소인 '명륜동4가 94의 2번지'를 지금껏 지키고 있다. 4·19와 5·16의 격동과 80년대를 청년문화 중심지에서 고스란히 버틴 학림은 그때마다 울분에 찬 지식인들과 학생운동가의 아지트 역할을 했다. 이청준·천상병·전혜린이 베토벤과 바그너를 듣던 이곳은 지금도 1500여장의 LP로 클래식 음악만을 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명지휘자 카라얀을 비롯한 음악계 거장들의 흑백사진이 2층 유리벽을 가득 채우고, 베토벤 흉상도 기둥에 그대로 걸려 있다.

예전 학림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곳에서 직접 로스팅한 원두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것. 와인도 메뉴에 추가됐다. 1987년 학림의 네 번째 주인이 된 이충열(57)씨는 96년 독일에서 3000만원을 들여 커피 로스팅 기계를 들여왔다. 국내에 스타벅스 1호점이 생긴 직후였다. 처음엔 원두커피가 낯선 손님들이 "무슨 커피가 이렇게 쓰냐"고 타박했지만 지금 학림은 커피를 직접 볶아 내리는 전문점으로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직접 볶은 커피 원두는 '학림 커피' 포장으로 팔기도 하며 지방에 공급하기도 한다.

주인 이씨는 "내부 분위기를 젊은 감각에 맞춰 꾸준히 바꾸고 메뉴도 개발한 결과 젊은 손님들이 여전히 많이 찾고 있다"며 "그러나 학림만이 지켜온 50여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계속 유지해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