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일 시각장애 앵커 4개월… 결론은 "성공"

그는 TV 뉴스 앵커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카메라를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 지그시 내리감은 듯 보일 때가 잦고 이따금 시선이 움직일 때도 시청자와 눈을 마주치는 일이란 별로 없다. 그는 입으로 뉴스를 말하면서 동시에 손으로 뉴스를 '읽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 장애 뉴스 앵커 이창훈(27)씨다. 4개월여 전부터 매일 KBS 1TV '뉴스 12' 중 5분짜리 코너인 '이창훈의 생활뉴스'를 단독 진행하고 있다. KBS는 "2009년 영국 민영방송에서 안면 변형 장애인을 1주일간 뉴스 진행자로 기용한 적은 있지만 시각 장애인이 뉴스의 고정 코너를 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했다. 중국,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외국 언론에서도 취재 요청이 들어온다고 한다. 최근 서울 여의도 KBS에서 만난 이 앵커는 "내가 잘해야 장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보도국의 이 앵커 책상에는 기사를 한 줄씩 점자로 변환해 주는 공책 크기 단말기와 고속 점자 프린터가 있다. KBS에서 그를 위해 지원한 장비들이다. KBS는 이 앵커의 이동과 업무를 도와주는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했다. 이 앵커는 "회사가 나를 위해 보도국 바닥에 점자 유도 블록을 새로 깔았다"며 "사무실에서 스튜디오를 오갈 때나 구내식당에 갈 때는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을 받지만 화장실 정도는 혼자 다닌다"고 했다.

방송 시간이 되면 그는 단말기를 들고 스튜디오로 간다. 단말기에 점자로 출력되는 기사를 손으로 바로 읽고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점자를 두 손으로 읽는 연습을 해서 (한 손에 비해) 점자를 빨리 읽는 편"이라며 "단말기가 갑자기 고장 날 때를 대비해 종이에 점자로 출력한 원고도 가지고 들어간다"고 했다.

이 앵커는 "처음엔 말이 너무 빠르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프롬프터를 보고 바로 말하는 게 아니라 점자를 읽으면서 하기 때문에 처음엔 방송 중에 말이 자주 꼬였어요. 그러나 이제는 막힐 것 같으면 장음(長音)을 일부러 더 길게 발음하거나 문장을 아예 잠깐 끊어 읽어서 박자를 늦추는 요령이 생겼습니다."

방송인으로서 그에게 가장 곤란한 일은 뭘까.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지적을 받으면 아직도 막막해요. '표정이 굳어 있다' '고개를 너무 든다' 같은 얘기를 듣는데 눈이 안 보이니까 스스로 내 모습을 봐 가며 고치기가 어렵거든요."

그는 "화면 속 시선이 좀 불안해 보이더라"고 하자 "방송 투입 전 '시선 고정하기' 교육을 받아 그래도 나아진 것"이라고 했다. "비장애인은 이런 교육은 받지 않는다. (시각 장애인은) 말할 때 시선이 초점 없이 흔들리거나 눈동자가 갑자기 휙 돌아가면 시청자들이 불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교육을 특별히 받았다"는 설명이다.

KBS 관계자들은 이 앵커가 '지독한 연습 벌레'라고 했다. 뉴스 시작 1시간 전인 오전 11시쯤 기사가 나오면 방송을 시작할 때까지 연습을 반복한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른 앵커·아나운서들의 뉴스 음성을 따라 하며 다시 몇 시간씩 연습을 한다. "시력 대신 다른 감각과 집중력이 발달해서 다른 사람의 음성을 들으며 특징과 강점을 빨리 파악합니다. 연습을 많이 해 둬야 급하게 속보가 나와도 자연스럽게 대응할 수 있죠."

뇌수막염 후유증으로 생후 7개월 때 시력을 잃은 이 앵커는 지난해 8월 KBS가 실시한 장애인 앵커 선발 시험에서 경쟁률 523대1을 뚫고 입사한 뒤 3개월 동안 사내 교육을 받고 뉴스에 투입됐다. "처음부터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은 원하지 않았어요. 장애인이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에 나오면 사람들이 뻔하다고 생각할 것 같았죠." 장애인 앵커 선발 과정을 총괄했던 임흥순 KBS 과학재난부장은 "장애인 앵커와 비장애인 앵커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이 앵커 기용은 성공적"이라고 했다.

이 앵커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보고 싶다"고 했다. "방송을 본 주변 사람들에게 더 솔직하게 지적해 달라고 부탁해요. 저는 장애인이기 전에 방송인이거든요. 발전을 위해서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