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부모·사회가 모두 웃는 결혼식… 내가 찾은 해법은 축의금 기부"

작년 10월 박세훈(57) 엘티에스 회장의 맏딸 주비(34)씨가 미래애셋 애널리스트 현준영(36)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 800명이 참석했다. 겉보기엔 여느 흥성(興盛)한 결혼식과 똑같았지만, 신부 아버지 박 회장이 축의금 1억여원을 고스란히 경기도 용인시 은혜학교에 기부했다는 점이 남과 달랐다. 은혜학교는 소년원을 나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대안학교다.

29일 서울 양재동 사무실에서 만난 박 회장은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했다. "사돈어른들은 물론 제 딸도 아직 제가 축의금 기부한 줄 몰라요.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아, 정말…."

박 회장은 '고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무학(無學) 홀어머니 밑에서 덕수상고를 졸업했다. 직장 다니다가 서른 살 때 창업해 바로 쫄딱 망했다. 이듬해 다시 에어컨 부품회사를 차렸다. 지금은 연매출 700억에 직원이 200명 넘는 알짜기업이지만, 처음 6년은 집에 돈 가져다 준 기억이 없다. 부인이 초등학교 교사 봉급으로 두 딸을 키우는 동안 박 회장은 공장에 야전침대를 놓고 밤 11시까지 물건 만들어 트럭 몰고 지방 돌며 새벽 4시까지 납품했다.

사업에 성공하니 판·검사 아들 가진 집에서 '딸 달라'는 맞선 자리가 잇따라 들어왔다. 딸은 '조건 보고 만나기 싫다'며 사양했다. 판·검사 마다하던 딸이 서른 넘어 집에 데려온 직장 동료가 지금 사위다. 전남 여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아들이었다. 박 회장은 "내 딸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흡족해했다.

양가가 합의해 예물·예단은 생략했다. 예비부부가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기들이 돈 모아 서울 서초구 연립주택 4층에 전셋집(50㎡·15평)을 얻었다.

박 회장이 도와준 건 예식 비용뿐이다. 명품 가방·시계는 일절 사주지 않았다. "그런 거 사는 사람, 나는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식이 끝난 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축의금을 은혜학교에 기부했다. "아깝지 않았느냐"고 묻자, 박 회장은 "돌아가신 어머니 가르침에 따랐을 뿐"이라고 했다.

박 회장의 어머니는 서른여덟에 혼자 된 뒤 포목점·여관· 중국집 해서 아들 넷을 가르쳤다. '이옥순' 이름 석자 빼곤 글을 쓸 줄 몰라 자기만 알아보는 삐뚤삐뚤한 기호로 장부를 썼다. 억새 같은 여장부였지만, 시장 사람들과 싸우다 "무식하다" 소리를 듣고 집에 와서 꺽꺽 울었다. 그런 어머니가 2008년 담도암에 걸렸다. 앞서 위암과 뇌출혈을 이겨낸 어머니였지만, 의사는 "길면 6개월"이라고 했다.

박 회장은 어머니를 위로할 방법을 고민하다, 어머니의 원불교 법명으로 어려운 집 대학생들에게 장학금 3000만원을 기부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야윈 손으로 아들의 손을 꼭 쥐며 환하게 웃었다. 박 회장은 "어머니가 평생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듬해 어머니가 84세로 별세했다. 박 회장은 부의금 9000만원도 장학금으로 냈다.

박 회장은 지난 2월 딸 부부를 은혜학교에 데려갔다. 하지만 "정기 후원하라"는 얘기만 했지, "내가 여기에 기부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딸 주비씨는 "아버지가 축의금을 기부했다는 얘기는 (취재팀과 통화하며) 처음 듣는다"며 깜짝 놀랐다.

박 회장은 "다른 사람 결혼식 갔다가 내심 불편할 때가 많다"고 했다.

"상류층이면 상류층대로, 중산층이면 중산층대로 각자 겸손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식을 치르면 되지, 어떤 절대적인 규범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형편보다 과하게 할 때 혼주도 고통스럽고 하객도 불편합니다. 이젠 부모와 사회가 모두 웃을 수 있게 결혼문화가 바뀔 때가 됐습니다."

그는 "제가 찾은 해답이 기부였을 뿐 남들도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어머니 돌아가실 때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다'는 원불교 가르침이 절절하게 다가왔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세상 덕분이지요. 그러니 축의금 욕심내면 되겠습니까."

 

-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시리즈 1부

- [부모의 눈물로 울리는 웨딩마치] 시리즈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