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IT기기에 전통 공예 '터치'

"냄새가 좀 역하지요. 저희는 친숙한데…. 몸에는 괜찮으니 걱정마세요."

원주시청 근처 단계동 주택가에 자리 잡은 전통공예연구소 문을 열자 구린내가 훅 끼쳤다. 옻칠 냄새였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이형만(66)씨의 공방은 어수선했다. 책상 위에는 자르다 만 자개(전복·소라 껍데기)와 실톱, 바탕 그림이 뒹굴었고, 마루 한 켠에선 옻나무에서 채취한 생칠과 흙가루를 섞어 침대에 자개를 붙이기 위한 기초작업을 하느라 바빴다.

이형만씨는 이번 주초 '핵안보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 57명이 선물로 받은 '나전칠기 갤럭시탭'을 만든 주역 중 하나다. 무형문화재 제10호 송방웅 나전장, 무형문화재 제113호 정수화 칠장(漆匠)도 참여했다. 갤럭시탭 뒤판에 남해안 전복껍질을 사용한 나전으로 모란 문양(가로 2.9㎝, 세로 2.1㎝)과 각국 정상 이름을 새겨 넣고, 국내산(産) 옻칠로 마감한 명품이다. 삼성전자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원장 최정심)이 기획·제작했다.

"뒤판을 고운 사포로 간 뒤 원주산(産) 옻칠을 칠합니다. 이 초칠이 중요한데, 중국산 옻칠을 쓰면 자개가 제대로 붙지 않아 말썽이지요." 이형만씨는 플라스틱에도 원주산 옻칠을 쓰면 자개가 끄떡없이 잘 붙는다고 했다. 중국산이 한 관당(3.75㎏) 약 30만원인데 반해, 원주산 옻칠은 8배가 넘는 관당 240만원이다. 이번엔 색상과 품질을 맞추기 위해 정수화 칠장이 정제한 옻칠을 가져다 썼다. "옻칠은 항균, 방습, 방충 효능이 뛰어난 천연염료인데, 원주산 옻칠은 특히 빨리 마를 뿐 아니라 내구성이 강해 흠집도 잘 나지 않습니다."

나전칠기 갤럭시탭은 옻칠을 하고 말리는 과정만 10번 정도 거쳤다. 반기문 UN 사무총장, 존 키 뉴질랜드 총리, 미셸 테메르 브라질 부통령 등의 이름을 직접 새겼다. 1990년대 중반부터 휴대폰, 노트북, TV에 나전칠기를 입힌 작품을 시도해왔다. "옻칠이 전자파를 막는다는 효능까지 밝혀졌는데, 대량생산에 들어갈려니 비싼 원료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말이죠. IMF위기가 닥치니까 기업의 돈줄이 모두 끊기더군요." 이씨는 "나전칠기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가 먼저 했는데, 일본이 한발 앞서 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통영 출신인 이씨가 나전칠기에 입문한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통영에 있던 도립 기술원양성소에 들어가면 공짜로 중학과정을 마칠 수 있다고 해서 앞뒤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이곳에서 평생 스승인 나전칠기 거장 김봉룡(1902~1994) 선생을 만났다. 졸업 후엔 김봉룡 선생이 만든 공방에 들어가 낮에는 나전칠기를 배우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녔다. 김봉룡 선생은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칠기장으로 뽑혔고, 그는 전수생으로 스승을 모셨다. 1968년 스승은 옻칠 생산지로 이름난 원주로 터전을 옮겼다.

1970년 군복무를 마친 스물넷 이형만은 인사차 스승이 있는 원주를 찾았다가 발목이 잡혔다. 1994년 스승이 세상을 뜰 때까지 곁을 지켰다. 1996년 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이 된 이씨는 2007년까지 배재대 칠예과에서 10년간 제자들을 키웠고, 요즘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매주 수요일 일반인에게 나전칠기를 가르친다.

나전칠기 분야는 1970년대부터 20년 남짓 전성기였다. 안방에 자개장농 한 짝씩 들이는 걸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값비싼 옻칠 대신 화학도료로 조잡한 자개농을 만드는 사람들이 늘면서 내리막길을 탔다. "어차피 한 번 겪어야 될 과정이었어요. 저야 그때도 선생님 모시느라 늘 쪼들렸지만요."

이형만씨는 자개를 손질하고 옻칠과 건조를 거쳐 마지막 광을 내는 작업까지 대략 45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짧게는 여섯 달에서 3년까지 걸리는,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이다. 정부가 공인한 최고의 나전칠기 장인이지만 이형만씨의 수입은 제자를 데리고 겨우 연구소를 꾸려나갈 정도다. "스승은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을 지키다 보니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