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부도… 3選의원 남편 잃고 이신우, 71세에 패션으로 돌아오다

    입력 : 2012.04.03 03:09

    80·90년대 '최대 디자이너 브랜드' 운영… 7일 서울패션위크 쇼로 컴백

    2일 딸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박윤정 아틀리에’에서 카메라 앞에 선 이신우씨. 뒤로 보이는 옷이 이번 서울패션위크에서 선보일 작품 중 하나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1977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최초 참가, 1990년 도쿄 컬렉션 최초 초청, 1993년 파리 컬렉션 최초 참여…. 한때 한국 '최초' '최고'라는 타이틀만 달고 다녔다. 김혜자·김자옥·정영숙 같은 당대 최고 배우들이 단골 고객이었다. 디자이너 브랜드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회사를 이끌었다. 남편은 3선(選)의 고(故) 박주천 의원.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1998년 IMF 외환위기 앞에 철옹성 같던 그의 패션 인생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71). 1980~ 90년대 패션 회사 ㈜이신우(ICINOO)를 운영하며 '한국 패션계의 대모'로 불렸다가 부도와 함께 막(幕) 뒤로 사라졌던 그가 14년 만에 돌아왔다. 이씨는 7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2012 춘계 서울패션위크'에서 자신의 새 브랜드 'CINU(시누)'를 내걸고 공식 컴백한다.

    "이 자리로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릅니다. 제 남은 모든 것을 패션에 바치렵니다." 2일 둘째 딸 디자이너 박윤정(46)씨가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의상실 '박윤정 아틀리에'에서 만난 이씨의 얼굴엔 홍조가 맴돌았다. 시침핀이 송송 박힌 까만 핀 쿠션을 손목에 끼운 채, 일흔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게 정정한 모습으로 이번 패션쇼에서 선보일 옷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씨가 공식 무대에 서는 것은 2006년 춘계 서울컬렉션 이후 6년 만이다. 당시 그는 남편의 투병 등으로 정신없는 상황에 떠밀리다시피 해 쇼를 열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남편에 대한 의리이자, 자신을 따라 디자이너의 길을 걷고 있는 딸에 대한 애정으로 무대에 섰지만 준비 부족으로 일회성에 그쳤다. 당시 박 전 의원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구속됐다가 감옥에서 폐병을 얻어 투병 중이었다.

    "그때 호흡기에 의존해 사경을 헤매던 남편이 종이를 꺼내 펜을 부여잡고 메모를 하더군요. '당신, 이제부터 불같이 일어날 거야'라고." 남편은 컬렉션이 끝나고 세상을 떴다. 잠시 상념에 젖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 이제부터 불같이 일어날 겁니다. 하늘에 있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이씨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디자이너도 드물다. '최고'로 군림하다 부도로 '이신우' '이신우옴므' '오리지날리' '영우' '쏘시에' '이신우 컬렉션' 등 6개 브랜드를 채권자들에게 넘겨줘야 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고스란히 담은 브랜드는 홈쇼핑 등에서 팔리고 있지만 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단다.

    "딸아이가 저더러 그러더군요. 지하철역으로 다니지 말라고. 지하철역에 내려가면 제 이름을 그대로 단 저가 물품들이 매대에서 팔린다고." 이씨는 "내가 낳은 자식 같은 브랜드들을 어쩌지 못하니 억장이 무너졌다"면서도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였고 괜찮다"고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두문불출하면서 손뜨개를 했어요. 그렇게 힘들 때도 결국 찾은 게 패션이었던 거지요." 이씨는 "그간 수면 위로 등장하지 않았지 항상 패션과 함께했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로는 딸 윤정씨의 기술 고문을 자처하며 모녀가 함께 '패션'을 통해 암흑 같던 과거와 이별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최근 서울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에 재가입하며 공식 활동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990년 SFAA 창립 멤버로 참여했지만 96년 탈퇴했다가 16년 만에 다시 가입했다. "그동안 온전히 스스로를 비웠고 드디어 치유가 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는 투지가 생겼습니다."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소년의 국가'다. "일본 한 역사 드라마에서 아무것도 기댈 것 없는 소년이 언덕 위에 걸린 구름 하나만 바라보며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이 나와요. 그 장면을 테마로 한 거지요." 아무것도 기댈 것 없던 노년의 패션 디자이너는 언덕 위에 걸린 '패션'이라는 구름 하나만을 바라보며 새로운 도약대 앞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