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고진. 별명은 '어둠의 변호사'. 나이는 30대 후반, 마른 체격에 검은 낯빛, 작은 눈에 비뚤어진 입술. 정의·불의(不義) 따위의 명분은 체질상 싫어하며, 항상 세상을 관조함. 한때 판사였지만 조직생활이 맞지 않아 법복(法服)을 벗고 뒷길을 돌며 미궁에 빠진 사건 해결….
'고진'이 누구냐고요? 제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입니다. 정확히는 제 소설에서 탐정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지요. 저는 추리소설 작가입니다. 2010년 5월 단편 '선택'으로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미스터리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했습니다. 같은 해 9~10월 고진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붉은 집 살인사건'과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연달아 출간했고, 지난해 7월엔 3편 '정신자살'이 나왔습니다. 첫 번째 책이 8100부, 두 번째 책이 6100부, 세 번째 책이 3600부 정도 팔렸고, 1·2편은 중국 호남인민출판사와 판권 계약이 돼 작년 11월에 2편이 먼저 번역 출간됐습니다.
독자들로부터는 '작가'라고 불리지만, 사실 제 본업은 판사입니다. 대학 졸업 후인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 현재 울산지법 부장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재판 진행을 맡고, 나머지 시간엔 기록 검토와 판결문 작성 등을 합니다. 엄정한 직무의 특성상 직장에서는 소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소설 이야기도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대신 집필에 몰두하는 주말이 되면 '소설가로서의 나'가 십분 발휘되지요. 법리(法理)에 따라 기록을 검토하고 판결하는 '판사 도진기'와 법의 허점을 소설 속 트릭으로 차용하는 '추리소설가 도진기'는 완전히 다른 인물인 셈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추리소설광(狂)이었습니다. 학교 도서실에 있는 추리소설을 몽땅 다 읽어치울 정도였지요. 코난 도일, 애거사 크리스티, 엘러리 퀸, 반 다인…. 복잡한 트릭을 사용해서 고도의 두뇌게임을 요구하는 본격 추리에 흠뻑 빠졌습니다. '누가 왜 이 범행을 저질렀을까?'라는 호기심으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다가 어느 순간 '팡!' 하고 사건이 해결되는 쾌감이야말로 추리소설의 진정한 매력이지요.
법률가의 길에 들어선 뒤 한동안 추리소설을 읽지 않던 제가 다시 추리소설에 손을 댄 건 헌법재판소 파견 근무를 하던 2009년 무렵이었습니다. 1시간 정도 지하철로 출퇴근하면서 소일거리 삼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시마다 소지 등 일본 추리 작가들의 작품에 흠뻑 빠졌지요. 일본 추리물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나라엔 왜 이런 본격 추리물이 없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번 써 보자'고 결심했지요. 2009년 말부터 단편 몇 개를 쓰기 시작했고, 이듬해 봄에 운 좋게 상을 받으며 데뷔했습니다. 다른 문학상에 응모하려고 장편을 준비하던 중, 아는 분이 출판사를 소개해줘 엉겁결에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구의 셜록 홈즈나 일본의 긴다이치 고스케처럼 '한국형 명탐정'이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에 만들어낸 캐릭터가 바로 '고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재판을 맡은 사건에서 소설 아이디어를 얻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지만, 제 소설 속 사건은 100% 픽션입니다. 현실의 사건은 추리소설 속 사건에 비하면 동기와 플롯이 너무 단순하거든요. 그리고 늘 접하는 사건을 소재로 삼는다면, 소설 쓰기가 업무의 연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발한 트릭과 그 해결에 몰두하는 '지적인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추리소설을 지향하되,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것이 작가로서의 제 목표입니다. 감성적인 접근을 배제, 철저히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상을 그려내 독자들이 인간과 악당(惡黨)에 대한 냉철한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도 하고요.
마흔이 넘어가고 직업에 익숙해지다 보니, 언젠가부터 '매일 같은 나날이 반복되며 사그라드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동기가 부여됐어요. 골프도 안 치고 다른 취미도 없는데, 힘든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글을 쓰며 잊을 수가 있지요. 판사로서의 저는 대체가능한 인물이지만, 책이란 저만 쓸 수 있는 '문화 산물'이라는 점이 뿌듯합니다. 처음 제가 추리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웃어넘기던 아내는 지금은 제 원고를 가장 먼저 읽고 조언해 주는 열혈독자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는 소설 속 캐릭터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고, 자기도 판타지 소설을 써보겠다며 열성을 보이지요.
현재 '고진' 시리즈를 두세 편 더 구상해 놓았고, 20대 백수 탐정을 주인공으로 한 새 시리즈가 곧 출간됩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유지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추리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일본에 진출해 일본 추리 작가들과 겨룰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언젠가는 존 그리샴류의 법정 스릴러에도 도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