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같은 집이에요. 실패작이죠, 실패작. 끔찍해요." 자신의 집을 보고 한 사내가 시종일관 자기 비하 발언을 쏟아낸다. 그것도 자신이 손수 설계한 집인데 말이다.
경기도 일산 마두동의 다가구주택 '소소재(素昭齋·밝고 투명한 집이라는 뜻)'. 건축가이자 시인인 함성호(49·EON 소장)씨가 자신이 살 집으로 5년 전 설계한 집이다. '건축가의 집'이라 해서 건축적 완성도를 최대한 지향한 작품을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날림 공사한 집 마냥 외벽은 군데군데 팼고 내부도 엉성하다.
"건축은 실험을 할 수 없는 분야잖아요. 남의 집에다 실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결국 내 집에 온갖 검증이 필요한 자재, 엄두 내보지 못했던 공간을 적용해 봤지요." 최근 이 집에서 만난 함씨는 자신의 집을 거대한 '건축실험실'로 여기는 듯했다.
실험 1단계. '저예산'이었다. 함씨는 수중에 쥔 현금 3000만원으로 집짓기를 감행했다. 상가 건물에 세 들어 어린이 전문 도서관을 운영하던 아내(시인 김소연)가 하루는 "집주인이 임대료를 월 150만원에서 2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한다"고 하소연했다. 아내의 얘기를 듣고 무심코 함씨가 뱉은 말. "아니, 그게 말이 돼? 차라리 그 돈으로 은행 이자를 내고 집을 짓겠다, 집을!" 이 말은 결국 그를 옭아맨 족쇄가 되고 말았다. 아내가 다짜고짜 남편에게 설계를 '의뢰'한 것이다.
건물 3층까지 소리 울림 ‘뻥’… 고래 식도를 형상화… 온갖 건축 실험이 시도된 건축가 함성호씨의 일산 다가구주택 ‘소소재’. ‘소리가 살아 있는 집’을 실험하려 건물 가운데를 뻥 뚫어 계단으로 이었다. 고래 뱃속에 들어간 성경 속 요나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고래의 식도처럼 디자인했다고 한다. 벽면의 노출 콘크리트도 여러 종류의 나무판으로 찍어내 결이 고르지 않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갖고 있던 3000만원에 은행대출(3억2000만원)을 받아 일산에 땅 70평을 샀다. 살던 아파트는 전세를 주고 부모님과 아내 총 네 식구가 비좁은 복층 원룸으로 옮겼다. 전세금에서 원룸 월세를 빼고 남은 1억1500만원을 공사비로 썼다. 어린이 도서관을 넣고 대출금을 갚기 위해선 다가구주택(연면적 330㎡)이 답이었다. 1층엔 도서관을 배치하고, 2층은 원룸 하나·투룸 두 개의 총 3가구로 나눴고, 3층은 자신의 집으로 했다. "아직 매달 200만원 넘게 대출금을 갚고 있어요. 빚더미 위에 집이 세워진 거죠."
2단계 실험은 본격적인 설계 구상으로 '조경과 건축의 융합'이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였다. '집을 나무처럼 심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빛이 잘 드는 곳에 식물 심을 위치부터 잡고 집은 나머지 공간에 음지 식물처럼 끼워넣었다. 그러다 보니 귀퉁이가 팬 비정형 건물이 됐다. 자투리땅도 조경 실험 대상이었다. 1층 건물 진입부에 돌을 깔고 그 사이에 생긴 50㎜의 틈에 토끼풀을 심었다. '오십미리 정원'이다.
'소리'도 중요한 실험 과제였다. '소리와 냄새도 살아있는 공감각(共感覺)적인 집'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건물의 중심을 3층 끝까지 뻥 비워 계단으로 연결하고 '건물의 울림통'으로 삼았다. '고래의 식도(食道)'를 형상화한 거란다. "대지를 보니 마치 고래처럼 생겼더라고요. 문득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죄로 고래 뱃속에 삼켜진 채 회개를 한 요나가 생각났지요." 소리 실험의 성공 여부를 묻자 "너무 성공해서 탈"이라며 "아침마다 1층에서 올라오는 채소 장수 소리에 깬다"고 했다.
(사진 왼쪽)집안 복도 벽이 미장 없는 거친 벽돌… 복도 양옆으로 미장을 덧대지 않고 시멘트 벽돌에 흰 페인트칠만 해서 완성한 내벽이 보인다. 긴 복도 끝엔 문이 없는 방이 있다. 문 없이 구조만으로 방음할 수 있는지 실험했다. (사진 오른쪽 위)나무 먼저 심고 빈자리에 건물 지어 비정형이 됐다… 소소재 외관.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을 먼저 잡고 나머지 공간에 맞춰 집을 설계했다. 그랬더니 건물이 반듯한 직사각형이 아니라 귀퉁이가 팬 비정형이 됐다. (사진 오른쪽 아래)나무로 만든 방범창!… 세입자가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나무로 만든 방범창. 쇠로 된 방범창보다 한결 따뜻한 느낌이다.
외벽의 노출 콘크리트도 실험 무대였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쪽널(폭이 좁게 켠 나무판) 거푸집을 활용해 콘크리트를 찍어냈다. 그 결과 벽면마다 다른 나뭇결이 찍혀 있다. 단열은 우주선에 쓰인다는 초경박 0.5㎜ 알루미늄 단열재를 썼다.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제품이었다. 결과는? "실패예요. 추워서 못 살겠어요." 그의 '사용후기'다. 내벽은 예산 부족으로 시멘트 벽돌을 쌓고 미장 없이 바로 흰 페인트칠을 해서 마감했다. 함씨는 "흰 벽 때문에 카페 느낌이 난다며 젊은 세입자들이 좋아하더라"고 했다.
소소재는 함씨에게 '건축주로서의 괴로움'을 알려줬다. "건축주들한테 '죽을 수에 집을 짓는다'고 경고해 왔었지요. 제가 딱 그 짝이 된 거죠. 날이 갈수록 시공자의 눈은 침침해지는 것 같고, 건축주의 눈은 점점 현미경처럼 미세해져 하자투성이만 보이더군요."
허무하게도 이 집을 짓는 동인(動因)이었던 '아내의 어린이 도서관'은 몇해 전 문을 닫았다. "집을 짓는다는 게 뭐 다 어리석고 그런 과정인 거죠." 함씨의 휴대전화 케이스엔 그의 호 '야매'가 새겨져 있었다. 들 야(野), 눈어두울 매(昧). 자신을 '촌스럽고 아둔한 자'로 칭하는 이 사내, 그의 건축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