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의 길 위에서] 천년 숲에서 만난 동백꽃 천국
입력 : 2012.04.05 23:09
광양 백운산 옥룡사지에 숨은 유서 깊은 동백나무 7000그루
아무도 없는 숲길 점점이 밝히는 타는 듯 붉고 청초한 작은 꽃들
늦추위 탓 봄꽃 더딘 속에서도 4월 내내 피고 지며 행복을 주네
4월의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숲길을 걷는다. 바람이 쏴 하고 숲을 쓸고 가면서 파도소리를 낸다. 겨울잠에서 일어난 벌들이 꿀을 찾아 웅웅대는 소리가 온 숲에 나직하게 깔린다. 간간이 지저귀는 새들.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한 점도 없다. 아직은 시린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머리가 절로 맑아진다.
전남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은밀한 꽃 천국, '동백의 샹그릴라'를 만났다. 백운산 지맥(支脈) 백계산 남쪽 언덕 15㏊에 적어도 100살 넘은 동백나무 7000그루가 빽빽하게 서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림 여섯 곳 중에 가장 크다. 경남 거제 학동리와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숲의 일곱 배, 전남 강진 백련사와 전북 고창 선운사 숲과 견주어도 세 배다. 수령(樹齡)이 보통 300년이고 600년 넘긴 나무도 대여섯 그루 있다고 한다.
옥룡면 추산리 한적한 찻길에서 300m쯤 걸어 오르면 동백숲과 마주친다. 여전히 겨울빛 황량한 산기슭에서 아연 싱그러운 초록 숲이 시작된다. 그 속으로 동백이 터널을 이룬 산책로가 나 있다.
어둑하게 우거진 숲을 점점이 빨간 꽃불이 밝혔다. 야무지도록 작은 동백꽃들이다. 타는 듯 붉지만 사람을 질리게 하는 농염(濃艶)이 아니다. 맑고 단아하다. 어찌나 매무새가 깔끔한지 만개(滿開)한 꽃에서도 청초함이 묻어난다. 이제 막 꽃잎을 풀어내려는 망울들은 영락없이 덜 핀 장미다.
동백(冬柏)은 흔히 겨울꽃으로 알지만 뭍에서는 3~4월이 제철이다. 이르면 11월부터 몇 송이씩 피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우르르 꽃을 피운다. 이곳도 3월 하순부터 시작한 붉은 합창이 4월 한 달을 이어갈 것이다.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 두 번 핀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게 피었을 때 누군가 잘라내듯 송이째 툭 떨어진다. 땅바닥에서도 선연한 진홍빛이 한참을 간다. 화려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낙화(落花)다. 동백 숲길엔 피어나는 기쁨과 스러지는 슬픔이 함께한다.
100m쯤 되는 숲길을 벗어나면 눈앞이 환해지면서 산 중턱에 축구장 두 배만한 평지가 펼쳐진다. 통일신라 말 풍수의 대가, 도선 국사가 세웠다는 절 자리다. 도선은 864년 자기 도호(道號)를 딴 옥룡사(玉龍寺)를 짓고 35년을 머물다 입적했다고 한다. 옥룡사는 1878년 불이 나 타버리고 폐사지(廢寺址)로 남았다.
동백숲은 옥룡사지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다. 도선이 절을 지으면서 땅 기운을 북돋우고 불을 막으려고 심었다고 전해온다. 동백은 잎이 두껍고 나무에 수분이 많아 방화림(防火林) 구실을 한다. 도선의 혜안(慧眼)도 절은 타버리고 동백만 남을 줄은 살피지 못한 셈이다.
전남 광양 백운산 자락에서 은밀한 꽃 천국, '동백의 샹그릴라'를 만났다. 백운산 지맥(支脈) 백계산 남쪽 언덕 15㏊에 적어도 100살 넘은 동백나무 7000그루가 빽빽하게 서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림 여섯 곳 중에 가장 크다. 경남 거제 학동리와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숲의 일곱 배, 전남 강진 백련사와 전북 고창 선운사 숲과 견주어도 세 배다. 수령(樹齡)이 보통 300년이고 600년 넘긴 나무도 대여섯 그루 있다고 한다.
옥룡면 추산리 한적한 찻길에서 300m쯤 걸어 오르면 동백숲과 마주친다. 여전히 겨울빛 황량한 산기슭에서 아연 싱그러운 초록 숲이 시작된다. 그 속으로 동백이 터널을 이룬 산책로가 나 있다.
어둑하게 우거진 숲을 점점이 빨간 꽃불이 밝혔다. 야무지도록 작은 동백꽃들이다. 타는 듯 붉지만 사람을 질리게 하는 농염(濃艶)이 아니다. 맑고 단아하다. 어찌나 매무새가 깔끔한지 만개(滿開)한 꽃에서도 청초함이 묻어난다. 이제 막 꽃잎을 풀어내려는 망울들은 영락없이 덜 핀 장미다.
동백(冬柏)은 흔히 겨울꽃으로 알지만 뭍에서는 3~4월이 제철이다. 이르면 11월부터 몇 송이씩 피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우르르 꽃을 피운다. 이곳도 3월 하순부터 시작한 붉은 합창이 4월 한 달을 이어갈 것이다.
동백꽃은 "나무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 두 번 핀다"고 한다. 가장 아름답게 피었을 때 누군가 잘라내듯 송이째 툭 떨어진다. 땅바닥에서도 선연한 진홍빛이 한참을 간다. 화려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한 낙화(落花)다. 동백 숲길엔 피어나는 기쁨과 스러지는 슬픔이 함께한다.
100m쯤 되는 숲길을 벗어나면 눈앞이 환해지면서 산 중턱에 축구장 두 배만한 평지가 펼쳐진다. 통일신라 말 풍수의 대가, 도선 국사가 세웠다는 절 자리다. 도선은 864년 자기 도호(道號)를 딴 옥룡사(玉龍寺)를 짓고 35년을 머물다 입적했다고 한다. 옥룡사는 1878년 불이 나 타버리고 폐사지(廢寺址)로 남았다.
동백숲은 옥룡사지를 삼면으로 에워싸고 있다. 도선이 절을 지으면서 땅 기운을 북돋우고 불을 막으려고 심었다고 전해온다. 동백은 잎이 두껍고 나무에 수분이 많아 방화림(防火林) 구실을 한다. 도선의 혜안(慧眼)도 절은 타버리고 동백만 남을 줄은 살피지 못한 셈이다.
동백나무는 수명이 300살쯤이라고 한다. 도선이 동백을 심은 지 1150년. 그 사이 동백이 늙어 죽고 다시 씨앗을 내려 자라기를 서너 차례는 거듭했을 것이다. 숲에는 텅 빈 줄기에 시멘트를 채워넣은 고목(枯木)이 적지 않다. 그렇게 제 삶을 다해가는 한편으로 둥치 아래서 여린 줄기로 솟아오르는 새 생명도 있다. 천년 숲이 그렇게 이어오고 있다.
옥룡사지 동백숲은 그늘에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좋을 딴 세상이었다. 고적(孤寂)한 꽃천지를 거닐며 신기했다. 연륜도 규모도 으뜸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동백숲이 이리도 호젓하다는 게 신통했다. 동백꽃 피는 3월 하순부터 한 달 가까이 백운산 너머 섬진강변에 매화·산수유·벚꽃이 잇따라 꽃폭죽을 터뜨리는 덕분이 아닐지. 사람들이 그 화려한 꽃잔치에 취해 산 너머 옥룡사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 같다.
옥룡사지에 대웅전을 복원하고 도선의 풍수사상 수련관도 만든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빈 곳을 꼭 무언가로 채워야 성이 풀리는 것일까. 새뜻하게 단청 입힌 새 절은 옛 절터의 감흥을 따를 수가 없다. 포클레인이 파헤치고 건물이 올라서면 동백숲도 별천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올해 봄꽃들은 사보타주라도 하듯 유달리 더디 핀다. 백운산 동쪽 기슭 광양 다압마을에선 3월 17일 시작한 매화축제가 25일 끝나도록 꽃이 거의 피지 않았다. 광양 매화도, 구례 산수유꽃도 4월 들어서야 제대로 피었다. 하동 화개장터 벚꽃 음악회도 7일부터 열리지만 기상청 홈페이지 개화(開花) 사진엔 5일까지도 꽃 소식이 없다. 늦추위 탓에 축제들은 다 어긋나버렸고 꽃때 맞추기는 갈수록 까다롭다.
이상기후가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변함없이 오래 맞아주는 꽃이 동백이다. 화르르 피었다 화르르 져버리는 봄꽃들과 달리 옥룡사지 동백꽃은 4월 내내 피고 진다. 그러면서 이 외진 숲에 찾아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옥룡사지 동백숲은 그늘에 하루종일 앉아 있어도 좋을 딴 세상이었다. 고적(孤寂)한 꽃천지를 거닐며 신기했다. 연륜도 규모도 으뜸이고 아름답기까지 한 동백숲이 이리도 호젓하다는 게 신통했다. 동백꽃 피는 3월 하순부터 한 달 가까이 백운산 너머 섬진강변에 매화·산수유·벚꽃이 잇따라 꽃폭죽을 터뜨리는 덕분이 아닐지. 사람들이 그 화려한 꽃잔치에 취해 산 너머 옥룡사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 같다.
옥룡사지에 대웅전을 복원하고 도선의 풍수사상 수련관도 만든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빈 곳을 꼭 무언가로 채워야 성이 풀리는 것일까. 새뜻하게 단청 입힌 새 절은 옛 절터의 감흥을 따를 수가 없다. 포클레인이 파헤치고 건물이 올라서면 동백숲도 별천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올해 봄꽃들은 사보타주라도 하듯 유달리 더디 핀다. 백운산 동쪽 기슭 광양 다압마을에선 3월 17일 시작한 매화축제가 25일 끝나도록 꽃이 거의 피지 않았다. 광양 매화도, 구례 산수유꽃도 4월 들어서야 제대로 피었다. 하동 화개장터 벚꽃 음악회도 7일부터 열리지만 기상청 홈페이지 개화(開花) 사진엔 5일까지도 꽃 소식이 없다. 늦추위 탓에 축제들은 다 어긋나버렸고 꽃때 맞추기는 갈수록 까다롭다.
이상기후가 이상하지 않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변함없이 오래 맞아주는 꽃이 동백이다. 화르르 피었다 화르르 져버리는 봄꽃들과 달리 옥룡사지 동백꽃은 4월 내내 피고 진다. 그러면서 이 외진 숲에 찾아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