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한·미, 한·EU) 한 지 언젠데… 값 내린 품목 반도 안돼

영업상 접대 목적으로 대형 마트에서 양주를 자주 구입하는 직장인 이선인(36)씨는 FTA(자유무역협정) 발효 효과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한·EU FTA가 지난해 7월 1일부터 발효돼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양주 가격은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5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밸런타인 17년산 가격은 14만5000원으로 지난해 7월 이전과 같다. 이씨는 "FTA 발효에도 양주 값이 안 내리니 중간에 누가 가로채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관세 내렸지만 절반이 요지부동

한·EU FTA가 지난해 7월 1일 발효돼 9개월이 흘렀고, 한미 FTA가 지난달 15일 발효돼 20일이 흘렀지만, 상당수 수입품이 전혀 가격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거래위원회가 5일 관세 인하 폭이 큰 품목 13개의 가격을 FTA 발효 전과 비교한 결과, 절반이 넘는 7개 품목 가격이 FTA 이후에도 전혀 내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가격을 조사했는데, 조사 대상 13개 품목 중 다리미와 전동칫솔, 프라이팬, 위스키, 맥주, 오렌지주스, 포도주스 등의 가격이 전혀 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입업자와 유통업자들만 이득을 취할 뿐 소비자들에게는 전혀 혜택이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공정위 관계자는 "다리미, 전동칫솔, 프라이팬, 위스키의 경우 한·EU FTA 수혜 품목들인데 발효 후 9개월이나 지났는데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이들 품목의 경우 유통단계별로 불공정행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입업자가 대리점들에게 가격을 내리지 말라고 강요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렇게 되면 대리점 간 경쟁을 통해 가격이 내려갈 가능성이 사라지는데, 공정위는 이를 '재판매 가격 유지행위'로 처벌하고 있다.

공정위는 FTA 이후에도 가격이 내리지 않는 품목에 대해 유통단계별 가격 결정 구조를 추적해 분석한 정보를 발표함으로써 적극적인 가격 인하를 유도할 계획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소비자원 및 소비자단체와 공조해 필요하면 소비자 운동을 지원하고, 중간에 불공정행위가 있었는지 여부도 조사해 위반 사실이 확인되면 엄중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공정위의 이 같은 방침에 일부 업체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웰치 주스 원액을 들여와 제조 후 판매하는 농심은 웰치 포도와 오렌지 주스의 출고가격을 8% 내리겠다고 5일 발표했다.

◇오렌지 가격 폭락에 농식품부 긴장

반면 가격이 관세 인하 폭 이상으로 떨어진 품목도 있었다. 모두 농산물이었다. 오렌지는 관세율이 20%포인트 떨어졌는데 가격은 25% 내렸고, 아몬드와 호두도 비슷하다.

이 같은 품목은 모두 관세 인하 후 수요가 크게 늘 것으로 보고 수입업체들이 수입을 대폭 늘린 품목들이다. 이 가운데 오렌지는 농림수산식품부를 긴장시킬 만큼 가격 인하폭이 크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오렌지가 감귤, 한라봉 등 같은 품종의 과일 수요만 대체하는 게 아니라 딸기 같은 다른 품종의 과일 수요도 대체하면서 전반적인 과일 가격 인하를 유도할 수 있다"며 "긴장하면서 가격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5일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오렌지 가격은 개당 1100원으로 대체재인 '천혜향'의 2490원의 절반 수준도 안 된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공정위가 선정한 21개 품목 가운데 관세 인하폭 이상으로 가격이 떨어진 게 공교롭게도 모두 농산물이었다"며 "국내 농업이 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