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남기고 불편만 고친다… 주민이 만든 동네

서울 성북구 삼선동 300번지 일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병풍처럼 두른 경사진 비탈에 장수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166채 낡은 집들이 마치 1960~7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 온 듯한 풍경을 간직한 채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은 2004년 재개발예정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인근에 사적 10호 한양도성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37호 삼군부 총무당(三軍府 總武堂·조선 말 군사기관)이 버티고 있으며, 위치도 좁고 꼬불꼬불한 경사가 심한 데다 지반이 약해 용적률을 많이 확보할 수 없어 개발업자의 관심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다. 마을 토지 약 64%가 국공유지이고, 무허가 주택도 많으며 빈집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개발구역으로 묶이다 보니 집주인이 수리를 꺼려 동네는 갈수록 퇴화했다.

그런데 낙후한 '달동네'로 치부되던 이 장수마을이 최근 각광을 받고 있다. 서울시가 박원순 서울시장 핵심 과업으로 추진하는 마을공동체 만들기에서도 장수마을이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일본·홍콩·대만 도시 문제 전문가들도 이곳을 찾아 성공 비결을 배워갔다.

주민의 65% 이상이 60살이 넘는 고령인 작은 마을이 새롭게 거듭나게 된 배경은 무얼까. 그 밑동에는 2008년부터 활동한 시민운동가들(대안개발 연구모임)이 만든 '동네목수'라는 마을기업이 있다. 동네목수는 도시 대안개발에 열정을 지닌 박학룡(43) 대표가 주도하는 일종의 실내건축 업체다. 완전히 다 뜯어내고 새 고층아파트를 올리는 뉴타운식 개발 대신 주민들이 참여해 있는 집을 고쳐 말끔하게 단장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도 회복하는 일석이조를 노리는 구상이다.

'동네목수'는 지역 내 빈집 리모델링, 집수리 등을 통해 수익을 올리며 평소에는 2~3명이 일하지만 일이 몰리면 주민 10여명이 함께 한다. 박 대표는 "집수리에 참여한 주민 30명이 받아간 인건비가 4000만원쯤 된다"며 "주거환경개선과 주민 일자리, 소득창출이 동시에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목수'를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회복은 집수리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동체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민들이 만족하는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해 마을 벼룩시장, 골목 디자인(벽화), 텃발 분양, 목공 교실 등 다양한 사업이 전개된다.

장수마을에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박 대표는 "마치 서울시가 큰돈을 써서 마을을 확 바꿔줄 것 같은 기대감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인동 서울혁신기획관은 "마을공동체는 공무원이 나서거나 주도하지 않고 시민이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 핵심원칙"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달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공포했고 올 하반기부터 장수마을 같은 마을공동체를 지원할 계획이다. 6월에는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을 총괄적으로 지원하는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지원센터'를 세운다. 장수마을 말고도 공동육아·대안교육이 특징인 마포구 성미산마을, '한국의 산토리니'로 변신한 부산 감천마을도 마을공동체 복원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