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저당 설정비 반환 집단소송에 4만여명 몰려

직장인 김선정(45)씨는 2007년 서울 강남 아파트를 11억원에 사면서 3억4000만원 가량의 대출을 받았다. 한때 3억원 이상 올랐던 집값이 예전 구입가격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매달 빠져나가는 130만원의 이자 부담이 더욱 속 쓰리다.

그러던 차에 그는 지난달에 희소식 하나를 들었다. 한국소비자원이 진행하는 집단소송에 참여하면 대출을 받을 때 냈던 근저당〈키워드〉 설정비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당장 집단소송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는 "승소하면 130만원가량을돌려받을 수 있다고 한다"고 전하며 "한 달 이자 정도는 아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은행에 집단소송 참여자 4만1000여명

시중은행과 소비자 사이에 물러설 수 없는 소송 대전(大戰)이 펼쳐질 전망이다. 8일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접수를 마감한 근저당 설정비 반환 집단소송에 모두 4만1000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신청자 가운데 2건 이상 대출을 받은 사람도 있어 대출 건수로 하면 5만여건에 이른다.

근저당 설정비는 주택담보출을 받을 때 들어가는 법무사 수수료와 등기 비용을 말하며, 대출 1억원당 60만원 안팎인데, 그동안 은행이 대출자에게 부담시켜 왔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08년 이 같은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은행들이 부당하다고 소송을 냈지만, 지난해 8월 대법원이 '근저당 설정비 등 대출 부대비용을 소비자가 부담케 한 은행 약관은 불공정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엔 소비자들이 대출을 받을 때 근저당 설정비를 물지 않고 은행이 부담하게 됐다. 또 과거에 대출받은 사람들도 힘을 모아 이미 낸 설정비를 돌려받자는 집단소송을 몇몇 법무법인이 추진하고 나섰다. 여기에 지난 2월 정부 기관인 한국소비자원이 가세해 "집단소송을 대리해 주겠다"고 밝힌 뒤 신청자가 폭주했다. 소비자원 관계자는 "상반기 중으로 제소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은행이 대출자에게 근저당 설정비를 전가하면서 부당 이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는데, 부당 이득 반환의 법정 소멸 시효가 10년이라 2003년 1월 이후 대출자에게만 신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2003년 1월 이후 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을 하면서 대출자에게 전가한 근저당 설정비는 1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소비자원은 추산하고 있다.

소비자원은 담당 부서인 금융보험팀의 인력을 2배 이상으로 충원하고, 아르바이트생까지 고용해 신청 서류를 정리하고 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자문변호인단에 서류를 넘기고, 변호인단은 이를 다시 검토한 뒤 제소할 계획이다. 신청이 들어온 5만여건의 평균 대출액을 1억원으로 가정하면, 평균 근저당 설정비는 60만원 정도이며, 소송가액은 300억원 정도가 된다.

◇은행들 "위법 아니다" 맞서 소송 불가피

이번 소송은 소비자원이 대리해 주며, 신청자는 인지대 비용으로 1만원 안팎 정도만 부담하면 된다. 단, 승소할 경우 은행으로부터 돌려받을 금액의 10% 정도를 변호사 성공 보수로 지급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은행들의 이익 단체인 은행연합회는 대출자들이 예전에 대출을 받을 때 스스로 설정비를 부담하는 데 동의를 한 만큼 돌려줄 의무가 없다면서 소송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해줄 때 고객들에게 근저당 설정비를 내고 할인된 우대 금리를 적용받을지, 아니면 설정비를 은행이 내도록 하고 일반 금리를 적용받을지 선택하도록 했다"며 "설정비를 낸 고객들은 설정비를 부담한 대신 우대금리를 적용받았으므로 은행이 설정비를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은행들은 지난해 8월 대법원 판결 이후엔 근저당 설정비를 자체 부담하고 있으며, 모든 대출자에게 우대 금리를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소비자원은 은행들이 '우대금리'란 표현으로 말장난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소비자원 관계자는 "설정비를 낸 고객은 일반금리로 대출받은 것이고, 설정비를 안 낸 고객은 '할증금리'로 대출받았다고 볼 수 있다"며 "은행이 설정비 부담을 기준으로 금리에 차등을 뒀다고 얘기하는 것은 스스로 모든 고객에게 설정비를 전가했다고 인정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2003년 1월 이후 대출자 가운데 아직 집단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법무법인 태산 등 일부 법무법인이 진행 중인 집단소송에 참여하면 된다.

☞ 근저당

은행이 대출을 해주면서 돈을 떼일 것에 대비해 주택 등을 담보로 잡고 등기부등본에 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출자가 대출을 못 갚게 되면 은행은 근저당 설정을 해둔 만큼 돈을 회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