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 "스타라는 수식어, 그 말 때문에 불행했다"

그는 '엄마'도, '어머니'도 아닌 '어미'란 말을 썼다. "엄마는 참 정겹긴 한데, 깊이가 좀 부족한 것 같고, 어머니는 참 거룩하고 깊이 있는데 살갑진 않다. 어미란 말에는 정겨움과 깊이, 그리고 '날것' 같은 느낌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입양한 9세 아들과 5세 딸을 키우고 있다. "어미를 해보니까 그만한 우주가 없어요. '봄, 눈' 시나리오 첫 장에 '새벽 첫차를 타고 일터에 나가는 모든 어머니에게 바칩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거기에 매료가 됐어요. 직장을 다니든, 전업주부이든 어미들의 모든 신경줄은 내 새끼, 내 가족한테 가 있거든요."

윤석화는 2년 전부터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리 멘지스와 공동 제작한 연극 '여행의 끝'을 상연했다. 웨스트엔드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아시아 프로듀서다. 최근에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파트너인 작사가 팀 라이스와 할리우드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뮤지컬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국 무대에서도 당신을 볼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모든 길을 언제나 열어놨다"며 "TV 사극 드라마에서 중전마마·대비마마 역할 같은 것도 하고 싶다"고 했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에서 백성희 선배가 맡은 할머니 역 같은 건 언제라도 좋아요. 아주 재밌는 캐릭터라면 주모 역도 괜찮을 것 같고. (목소리를 깔고 표정을 구기면서) 지가 사투리도 좀 헐 줄 알거든요.(웃음)"

소년처럼 짧게 깎은 머리를 손으로 쓰윽 쓸어넘기자, 은회색빛의 머리칼은 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도도하면서도 부드러운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윤석화는 김태균 감독의 첫 장편 영화 '봄, 눈'에서 암 투병을 하는 어머니 '순옥'의 역할을 맡으면서 삭발했다. 평범한 주부인 순옥이 세상을 떠나기 전 가족에게 희망을 남겨주고 헤어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지난달 말 서울 삼청동의 한 식당에서 만난 연극배우 윤석화씨는 "흰머리가 많기 때문에 머리를 짧게 깎으면 묘하게 음영이 질 것 같았다. 그 빛과 그림자의 경계가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을 나타내야 하는 이 영화의 캐릭터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머리를 1㎜만 남기고 밀었다"고 했다.

'봄, 눈'은 윤석화가 장길수 감독의 '레테의 연가'(1987) 이후 24년 만에 출연한 영화다. 1975년 연극무대에 데뷔해 줄곧 '스타 배우'로 살아온 경력치고는 영화 출연이 거의 없는 편이다. 그는 "'레테의 연가'를 나의 출연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후시 녹음(촬영 후 녹음) 때 성우가 내 목소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그건 내 연기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는 영화 출연 소감에 대해 "연극이 동양화라면 영화는 서양화 같다"고 했다. "동양화는 잘못 그리면 그림을 버려야 하고, 서양화는 덧칠을 하거나 고쳐 그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연극무대에 올라가면 배우가 잘못해도 감독이 '컷'을 외치거나 수정을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걸 배우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관객 앞에서 언제나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죠. 영화는 그런 면에서 좀 편해요. 카메라에 기댈 수가 있고, 감독이 뷰파인더를 통해서 계속 결정을 내리니까요."

그는 "반면에 영화가 힘든 면도 있더라"고도 했다. "기다림 때문이에요. 한 장면을 찍고 다음 장면을 찍기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감정이 이어지기가 힘듭니다. 또 테이크를 여러 번 가면(한 장면을 여러 차례 찍으면) 감정이라는 것도 닳더라고요."

무대생활 30여 년의 베테랑 배우인 그가 아직도 무대에서 '발가벗겨진 느낌'을 받는다는 건 어떤 뜻일까. 그는 "'신의 아그네스'를 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 용감하고 거침이 없었다. '신의 아그네스' 이후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그것 때문에 불행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때부터 '무대에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거든요. 아무리 관객이나 연출, 평론가들이 칭찬을 해도 내 눈엔 부족하게만 보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