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TALK] HD의 역설

최근 한 드라마 촬영감독은 "HD 촬영 화면을 모니터 하다 보면 찍는 내가 먼저 질린다"고 털어놨다. "세트장 뒤에 떨어진 쓰레기까지 또렷하게 찍히잖아요. 주인공 얼굴 모공이 숭숭 다 보이질 않나. 이러니 다들 후보정(後補正)에 공을 들이는 겁니다. 선명도는 낮추고 색깔은 더 화사하게 만드는 거죠."

HD(High Definition·고화질) TV가 대세인 요즘. 이에 맞춰 촬영기법도 '선명하게, 또렷하게'가 유행일 것 같지만 요즘 방송가에선 거꾸로 '덜 선명하게, 조금은 뿌옇게' 찍는 게 오히려 인기라고 한다. 지나치게 선명한 화면에 싫증을 느낄 시청자를 잡기 위해 새로운 화면을 구현하려는 것. 방송 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이른바 'HD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기존 HD ENG 카메라 대신, 보정이 쉬우면서도 더 환한 화면을 구현하는 '레드원' 또는 '알렉사' 카메라로 찍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라고.

SBS '샐러리맨 초한지' 등을 촬영한 이길복 감독은 "무작정 선명하게 찍는 것보단 색감은 화사하게 인물은 더 예뻐 보이도록 보정하는 게 요즘 추세다. 특수 카메라 필터를 쓰기도 하고, 빛을 가득 퍼뜨리는 특수 장비를 쓰기도 한다. HD 화면이지만 아날로그 화면 느낌도 내는 것"이라고 했다. 빛을 과도하게 넣어 화면을 흐릿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최근 방영 중인 KBS 드라마 '사랑비', JTBC '아내의 자격'이 대표적. 드라마·영화 촬영을 모두 해봤다는 강승기 촬영감독은 "일종의 여백 효과"라고 했다. "빛이 가득 들어오면 배경이 흐릿해지고 화면엔 여백이 생기죠. 빽빽하게 화면에 정보를 넣는 대신, 시청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겁니다."

SBS '힐링캠프', 케이블 채널 '올리브'의 '마스터쉐프코리아' 같은 예능프로들도 '덜 선명하게, 더 화사하게' 찍는 경우가 많아졌다. '올리브'의 김경수 CP는 "과거 사진기자들이 선명한 인쇄를 위해 슬라이드 필름을 쓰다가 나중엔 덜 선명한 네거티브 필름으로 옮겨갔다고 들었다. 동영상 촬영도 마찬가지"라며 "요즘엔 HD 촬영을 할 때도 부드럽고 빛이 가득한 화사한 화면을 구현해야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