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 다른 나] "증시분석도 글씨쓰기도 남들 못 본 '나만의 것'을 찾아내는 일이죠"

어제도 작업실에서 밤을 보냈다. 침낭 속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몸 여기저기가 쑤신다. 이제 이 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전시회만 끝나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선다.

나는 경력 19년차의 증권사 애널리스트다. 그중에서도 차트를 보고 주가의 흐름과 향방을 예측하는 '차티스트'다. 동시에 나는 대학 3학년 때 국전 수준의 전시회에 입상한 서예가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처음 서예학원에 들어선 이래 꾸준히 붓을 놓지 않고 실력을 연마해왔다. 그리고 2010년에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해 석사학위 청구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 화가 지망생이기도 하다. 서울 강동구 암사동의 10여 평 작업실은 수십 자루의 붓과 벼루, 먹, 한지, 캔버스, 아크릴 물감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애널리스트로서 내 생활은 무척 팍팍하다. 오전 7시부터 업무를 시작하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한다. 펀드매니저들이 정기적으로 선정하는 '베스트 애널'의 일정 등수 이내에 들지 못하면 퇴출되는 생존경쟁의 최전선에서 매일매일 살고 있다. 어쩌면 이 여유없는 삶의 돌파구가 되어 준 것이 서예이고 그림일지도 모른다.

나는 행서(行書)와 초서(艸書)를 많이 쓰는 편이다. 서예 중에서도 사람의 심성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것이 행서와 초서다. 해서(楷書)나 전서(篆書)는 규격화되어 있고 틀이 정해져 있어서 개성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에도 항상 대가들이 쓴 초서를 임서(臨書·글씨를 베끼는 것)하며 손을 푸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해왔다.

지난 1992년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 국전의 후신인 '대한민국 서예전람회'에 특선 입상한 것이 서예가로서 내 이력의 시작이었다. 당시 두 달 동안 골방에 처박혀 하루 8시간씩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709~ 785)의 해서를 베끼고 또 베꼈다. 아버지는 "취직 준비나 하라"고 말씀했지만, 나는 임서에 매달렸다. 입선작 명단에 내 이름이 없어서 서예가협회에 제출했던 글씨를 찾으러 갔다가, "무슨 소리냐, 특선인데…"라는 말을 들었다.

증권회사에 입사한 이후 애널리스트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면서도 글씨를 쓰고, 서예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정기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왔다. 1998년에는 '월간 서예'라는 잡지를 통해 서예 평론가로 등단해 몇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다음에 하고 싶었던 것은 그림이었다. 나는 애초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족들 반대로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이 '가 보지 못한 길'에 대한 궁금증은 항상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서양 유명 화가들이 동양의 서예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작품 활동을 하는 데 비해, 정작 우리는 우리의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정말 안타까웠다. 그렇게 늘 마음속에 '욕구 불만'을 안고 살아왔다.

계기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07년쯤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서울 여의도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림픽대로에서 택시 기사가 시속 120㎞로 밟았다. 문득 '아, 운전하는 분이 자칫 실수라도 하면 나는 그대로 죽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 혹은 결단의 순간은 그럴 때 오는 것일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홍익대 미술대학원(야간)에 응시해 합격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다고 서예와 동떨어진 세계를 간 것은 아니다. 리넨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는 내 그림은 서예에만 있는 '번짐'의 효과를 서양 회화에 접목하는 작업이다. 운도 따랐다. 당시 애널리스트로서도 자리를 잡아가면서 '차트의 기술'이라는 책을 써서 꽤 많이 팔렸는데 그 인세 수입으로 집 근처에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주말마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두 집 살림'이 시작됐다.

어떤 분들은 애널리스트와 그림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본업인 '차트 분석'과 회화나 글씨가 무관한 것만은 아니다. 나는 끊임없이 '보는 법'을 찾아왔다. 서예나 그림, 증권분석은 결국 '무엇을 보는가'의 문제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느끼지 못한 것, 깨닫지 못한 것을 찾아내고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차티스트나 화가의 일이다.

물론 보는 수준은 다를 것이다. 그렇기에 무수한 세월의 수련이 필요한 것 아닌가. 옛말에도 "소년 문장(文章)은 있어도, 소년 명필(名筆)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세월을 견디며 나는 증시 분석 자료를 섭렵하고, 옛 사람들의 글을 베끼고, 전시회를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