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83세 에릭 칼, 그 색채의 마법이 온다

햇살 따사로운 일요일 아침, 알에서 애벌레 한 마리가 나온다. 배고픈 애벌레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선다. 월요일에 사과 한 개를 먹고, 화요일엔 배 두 개를 먹는다. 수요일엔 자두 세 개, 목요일엔 딸기 네 개…. 일주일 동안 여러 가지 음식을 먹고 또 먹다가 몸집이 커진 애벌레는 고치가 되었다가 마침내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다.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그림책의 제목은 '배고픈 애벌레'다.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에릭 칼(Eric Carle·83)의 1969년 작품으로, 55개국에서 번역돼 3300만부가 팔려나갔다. 한국에선 영어에 입문하는 아이들의 필독서로 각광받는다. 영어 제목 'The Very Hungry Caterpillar'라고 해야 알아듣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애니메이션과 영어 연극으로도 만들어져 히트했다.

반세기 전 태어난 이 그림책의 생명력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동심을 닮은 강렬한 컬러(color)와 자유로운 화법(畵法) 아닐까요?" '에릭 칼 그림책 미술관' 알렉산드라 케네디(Kennedy·50) 관장의 말이다. 케네디 관장은 4월 1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에릭 칼 한국특별전'(9월 2일까지)을 위해 서울에 왔다. 에릭 칼 마니아라면 그의 원화 99점을 직접 볼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인쇄된 그림책으로는 에릭 칼이 빚어낸 환상의 색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지요. 붓으로 쓱쓱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작가가 직접 티슈 페이퍼로 제작한 색색깔의 종잇조각들을 오리고 붙여서 만드는 콜라주 작업이니까요. 원화에서는 에릭 칼의 그 손맛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에릭 칼은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색상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유감'이라고 말할 만큼 색상 표현에 뛰어난 작가다. "독일계 미국인인 에릭은 10대를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보냈어요. 나치시대였고 한창 그림공부를 할 때인데, 하루는 선생님이 집으로 에릭을 초대해 기묘한 그림들을 보여주더랍니다. 피카소·클레·칸딘스키 등 나치가 '타락한 예술'이라고 금기시했던 추상화들이었죠. 그 중 프란츠 마르크라는 독일 표현주의 화가가 그린 '블루 호스(Blue Horse)'의 강렬한 색채에 매료된 에릭은 2011년 '블루 호스'라는 제목의 그림책을 펴냅니다. 예술은 자유 그 자체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죠."

미국에서도 에릭 칼은 아이들의 우상이란다. "에릭 칼처럼 구레나룻에 배가 나오고 뚱뚱한 체형을 지닌 노인들은 'I am not Eric Carle'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에릭 칼, 에릭 칼' 부르며 쫓아오는 동네 아이들 때문이지요.(웃음)"

매사추세츠주 앰허스트에 자리한 '에릭 칼 그림책 미술관'은 2002년 개관했다. 생존하는 작가의 이름을 붙인 유일한 그림책 미술관으로, 한 해 4만5000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 명소다. 에릭 칼은 물론 '슈렉'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 '피터래빗'의 비어트릭스 포터,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모리스 센닥 등 유명 작가들의 원화 1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알렉산드라 케네디는 2008년 관장으로 부임했다. 월트디즈니에서 18년간 일했고 잡지 분야 부사장을 역임했다. 미술관장 초빙에 응한 이유는 "나와 아이들의 '영웅'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6세·14세 두 아들을 둔 케네디 관장은 "부모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 상상력을 길러주는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도 했다. "에릭 칼은 아이들 방에 종이와 물감을 늘 구비해놓으라고 말하지요. 우리 미술관도 아이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이 열려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예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연방정부, 매사추세츠 대학들과 협력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