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월 영전에 마지막 앨범 바친 원희옥

"우리는 레코드에 슬픈 노래 불렀지…이름도 우리 성도 우리 땅도 빼앗긴 한 많은 그 세월…."

지난달 24일 서울 장충동의 녹음 스튜디오. 원로배우 겸 가수 원희옥(75)이 노래 '인생무대'를 부르고 있었다.

낭랑하면서도 절절한 목소리로 녹음을 마친 원희옥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선생님이 아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며 웃음 지었다. 그러나 이틀 뒤 원희옥은 눈물을 쏟으며 빈소로 들어섰다. 그가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하려던 선생님, 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의 빈소였다.

반야월 생전 마지막 앨범의 주인공이 된 원희옥을 지난 5일 만났다. 그는 "선생님께 무대에 서는 걸 꼭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원희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지만 한국 대중예술의 산 증인이다. 여덟 살에 백조가극단 단원실에 놀러 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단원들 앞에서 노래 부른 것이 배우의 길을 걸은 계기가 됐다. "언니들 앞에서 '병원선'이랑 '아라비아 아가씨'를 불렀어요. '엄마'가 '내 수양딸 하라'면서 날 꼭 안아줬지."

원희옥을 끌어안은 '수양엄마'는 백조가극단의 히로인이자 당대 최고의 여배우 전옥이었다. 노래와 연기력이 뛰어났던 원희옥은 아역 스타로 유명세를 탔다. 반야월과 인연이 맺어진 곳은 6·25전쟁으로 연예인들이 대거 피란 와 머물던 부산이었다. 원희옥은 15세 때 반야월이 가사를 쓴 '남포동 마도로스'를 취입했다. "'꼬맹이가 목소리도 꾀꼬리 같다'며 얼마나 예뻐하셨는지 몰라. 그런데 극단 스케줄이 너무 빡빡했어요. 악극단 관두고 가수 했으면 방송도 나가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을 텐데…."

'50년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셈이지만 원희옥은 가극단 배우 생활에 전념했고, 1970년대 이후 TV쇼와 리사이틀 등이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면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는 반야월이 이끄는 전통가요인 모임에 참석하고, '눈물의 여왕'(1998)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2003) 등 악극에 출연하는 것으로 대중예술계와의 끈을 이어갔다. 그를 40여년 만에 '가수'로 컴백하게 도와준 이는 반야월과 친분이 두터운 작곡가 임정호(65)와 원로 가수 김활선(74)이었다. 반야월이 건넨 노랫말을 받아든 두 사람은 '가수로 원희옥이 제격'이라고 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애조 띤 목소리, 이난영의 맥을 잇는 유일한 가수입니다."(김활선) "목소리도 매혹적이지만 발음이 정확하고 호흡도 길어요. 천생 악극인의 핏줄입니다."(임정호)

반야월이 어린 시절 헤어진 누이동생을 그리며 쓴 가사에 임정호가 멜로디를 붙인 신곡 '진남포 누이동생'과, '목포의 소야곡' '인생무대' '남포동 마도로스' 등 리메이크 세 곡이 담긴 미니 앨범은 반야월에게 '깜짝 선물'로 증정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반야월이 3월 26일 95세로 별세하는 바람에 결국 그의 영전에 바치는 선물이 됐다. 원희옥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미소 지었다. "선생님이 하늘에서 좋아하시겠죠? '우리 희옥이 다시 노래 부르기 시작했구나'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