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일상에 향기를… 철판으로 꽃 피우는 남자

철판을 쉽게 자를 수 있는 레이저 커팅 기법을 접하며, 1995년에는 재료를 나무에서 철판으로 바꿨다. "철판을 사용하면서 (판화처럼) 여러 개의 에디션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작품값이 내려갔고, 보다 대중적이 됐다." 이번 전시회엔 도심을 지나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한 '5번가' 등 35점이 나왔다.

유쾌한 작품이지만, 풍자가 빠지진 않는다. 작품 '센세이션'(2010)은 굽 높은 여성용 부츠의 발 부분엔 개미가 오글거리고, 다리 부분엔 나비가 잔뜩 붙어있는 모습이다. 신발이 불편해서 개미에게 물린 듯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꾸밀 수밖에 없는 여성을 뜻한다. "직설적 비판보다는 즐겁고 유쾌하게 포장해 일단 관객 눈길을 끈 다음에, '사실은 이런 뜻이야' 하고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는 게 내 방식이다. 그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으니까." 전시는 5월 9일~6월 2일 가나아트 부산점에서도 열린다. (02)720-1020

 

그는 무거운 철판을 종잇장처럼 얇게 오려내 '가벼움'을 부여하고 그 위에 바쁘고 피곤한 도시인의 삶을 알록달록한 색채로 한없이 '경쾌하게' 색칠한다. 지겹고 뻔하고 남루한 일상을 최대한 즐겁고 예쁘장하게. 이스라엘 미술가 데이비드 거스타인(Gerstein·68)의 작업 방식이다.

"내 관심사는 '더 나은 삶(better life)'이 아니라 '평범한 삶(normal life)'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치·종교 등의 복잡한 문제보다는 자신의 일상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오는 29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무한한 기쁨(Infinite Joy)'을 여는 거스타인은 "미술관에 놓이는 것보다는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려 한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와도 어울릴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만든다"고 했다.

철판에 공업용 도료를 칠해 바삐 움직이는 행인, 꽃이 가득한 꽃병, 나비가 내려앉은 신발 등을 표현한 그의 작품은 이스라엘·싱가포르·프랑스·독일·영국 등 세계 각국의 광고판·공원·백화점 등에 공공조각으로 설치됐다. 국내에서는 서울 스퀘어 모건스탠리 빌딩 앞에 '8명의 자전거 타는 사람'(2010)이, 서울 자양동 롯데백화점 스타시티점 앞에 '가족 자동차'(2007)와 '오토바이 타기'(2007)가 설치돼 있다. 몇년 새 공공미술이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가볍고, 재미있고, 쉬워지면서 거스타인의 작품 인기도 함께 치솟았다.

그 역시 한때는 '무겁고 진지한' 작가였다. 예루살렘 브잘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유학을 다녀온 1960년대 후반, 그는 이스라엘 사회문제를 다룬 흑백 회화로 화단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이후 뉴욕·런던 등에서 유학하며 팝아트와 개념미술의 세례를 받은 후, 그는 달라졌다. 35세가 되던 1979년부터, 나무판을 얇게 잘라 일상의 사물과 장면을 표현하고, 팝아트와 액션페인팅에서 영향을 받은 알록달록한 공업용 페인트를 칠했다. 주변에선 "미쳤다"고, 부인마저 "당신처럼 훌륭한 화가가 왜 이따위 장난감을 만드느냐"고 했다. 거스타인 자신도 '대체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확신할 수 없었다고 했다. 대중과 평단의 길고 긴 침묵이 이어졌고, 응답은 8년 후에 왔다. 이스라엘 미술관에서 개인전 제의가 왔고, 반응은 뜨거웠다. 그는 "8년간 임신해 있다가 아기를 낳은 듯 했다"고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