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을 유럽식으로 그린 한국인

"내가 바라는 마지막 소원은 내가 사형을 당하는 날 보다 많은 구경꾼이 나를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지난해 초 '이방인'을 읽은 박민준(41)은 뫼르소의 이 독백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겼다. 섬세한 주름이 잡힌 둥근 칼라가 달린 흰 실크 블라우스, 검정 바지에 황갈색 부츠를 신은 남자가 건물 밖으로 막 걸어나가려는 참이다. 열린 문 틈새로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문 앞에서 한 무리의 군중이 함성을 지르며 남자를 맞이한다. '이방인'은 20세기 중반 알제리가 배경이지만, 박민준은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택했다. 배경뿐 아니다. 화풍과 기법 또한 강렬한 명암(明暗) 대비와 등장인물의 과장된 제스처로 극적인 화면을 연출한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1573~1610)를 모방했다. "미술관에서 르네상스·바로크 시대 유럽 화가들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들의 기교에 감탄했다. '왜 현대의 작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못할까' 항상 의문이었다."

22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에서 개인전 'The Stranger'를 갖는 박민준은 르네상스·바로크 시대 유럽 화풍으로 작업하는 화가. 홍익대 미대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 동경예술대학에서 유화 재료·기법을 공부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유화 20여 점은 모두 리넨 캔버스 위에 유럽풍의 소재를 그린 것. 젊은 작가들이 좀처럼 구상화에 손을 대지 않는 이 시대에 꼼꼼한 손맛의 작품은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는 "설치 작업만 높이 평가하는 컨템퍼러리 미술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래서 역으로 '나는 더 기본기를 다지자'고 결심했다"면서 "한국인이 유럽식 그리는 걸 두고 주위에선 걱정하지만, 막상 해외에선 그런 편견은 없더라"고 했다. (02) 519-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