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킨 井邑(정읍) 선비 '오블리주(도덕적 의무)' 기린다

정읍 내장산 금선계곡을 따라 돌길을 40분쯤 걸으면 깎아지른 절벽 사이 협곡. 쏟아지는 계곡물로 미끄러운 바위 바닥 위에 철제 다리가 놓였다. 다리를 타고 좁은 통로를 지난다. 이곳에서 서편 봉우리까진 잡목 우거진 60도 안팎의 가파른 비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한다. 돌길 70m쯤 위 중턱에 50㎡ 남짓 잡목이 우거진 판판한 땅이 나타났다.

지난 13일 기자를 안내한 정읍시 동학농민혁명선양팀장 박대길 박사가 돌무더기 사이에서 기왓장과 자기 파편들을 꺼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숨긴 은적암(隱寂庵) 터로 확실시되는 곳이라고 했다. 박 박사는 "길이 깊고 좁게 끊어지고 이어지다가(棧路斷續) 계곡 아래에선 감히 오를 수 없어 실록을 보관할 수 있었다고 옛 기록들은 전한다"고 설명했다.

◇궤를 메고 기어올랐던 은적암

고개를 들으니 손짓하며 부를 만한 건너편 공중에 내장산의 가파른 연봉이 성채처럼 둘러서 있다. 절벽 아래로 조선왕조실록을 넣은 궤를 메고 기어오르는 조선의 백성과 승려, 관원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임진왜란 2개월 뒤인 1592년 6월 전라도 태인현(현 전북 정읍시 태인면)의 안의·손홍록 등 선비와 백성, 전라감영 관헌 그리고 내장사 승려들이 계곡에선 보이지 않는 이곳으로 실록을 옮겼다.

조선왕조실록은 세종 27년(1445년) 이후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의 사고(史庫)에 보관됐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5월 3일 한양을 점령했고, 성주·충주와 춘추관의 사고는 차례로 불탔다. 임진강에서 되돌아 남하한 왜군 일부는 그해 6월 전라도 금산(충남 금산군)을 유린한 뒤 전주를 향해 이치(완주)와 웅치(진안)를 지나고 있었다.

◇온전히 지켜낸 조선사와 태조 어진

내장산에 숨긴 전주사고의 실록과 어진은 1년여 뒤인 1593년 7월 충남 아산과 해주, 강화도를 거쳐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안의와 손홍록은 묘향산까지 실록을 함께 옮기고 지켰다. 선조는 종6품 벼슬을 내렸으나 두 선비는 '백성된 도리였다'며 거절했다. 전주사고 실록은 임란 후 다섯 본으로 제본돼 춘추관, 오대·태백·묘향(적상)·마니(정족)산 사고에 보관됐고, 전주사고는 정족산과 경성제대에 이어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고 있다. 태조 어진은 왜란 중 불탔다가 1614년(광해군 6년) 중건된 경기전에 다시 모셔진 뒤 한국 유일본으로 물려 내려오고 있다.

급박한 전황 속에서 전라감사 이광은 전주사고의 실록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된 태조 어진(御眞)을 피난시켜야 했다. 안의와 손홍록이 64세와 56세의 노구에 가동(家童)들을 데리고 경기전에 달려왔다. 두 사람은 당대 호남의 대학자 이항의 제자였다.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무사 김홍무, 수복(守僕) 한춘 등과 함께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을 거쳐 은적암으로, 태조 어진을 용굴암으로 옮겼다.

이들이 옮긴 역사는 조선 태조~명종 때의 실록(810책)에 고려사 등 문헌까지 모두 1344책에 이르렀다. 어진과 제기(祭器)까지 옮겨 담은 함과 궤는 모두 60여개였다. 이들은 실록과 어진을 더욱 깊숙한 내장산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긴 뒤에도 밤낮을 이어 지켰다. 실록을 옮기고 지키는 일에는 내장사의 의병장 회묵 등 승려들도 함께했다.

◇안의·손홍록 "백성된 도리였다"

그로부터 420년 뒤 이곳 내장산 실록 보존 유적을 정읍시가 역사문화 자원으로 정비·복원하고 나섰다. 유적지 지표 조사를 끝내고 지난 11일 김생기 정읍시장이 국립공원 내장산관리사무소 김종담 소장, 내장사 주지 지선 스님 등 각계 인사 30여명과 용굴·은적암 등을 답사했다. 지표 조사에 참여했던 하태규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선비와 백성·의승(儀僧)·관원이 목숨을 걸고 풍전등화의 조선 전기(前期) 역사를 지켜냈기에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이를 온전히 살피고 자랑하게 됐다"며 이 사업 태동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시는 지난해 용굴·은적·비래암터 등에서 정밀 지표 조사를 벌여 고려~조선의 문양이 새겨진 기와와 자기 파편들을 찾아냈다. 용굴암에선 장방형 석제 구획도 확인됐다. 올해 발굴로 이 터들을 심층 조사한 뒤 내년 이후 복원·정비에 나서면서 이들 지역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받을 계획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시는 이곳 유적지 복원·정비가 끝나는 2014년 '조선왕조실록 문화축전'을 벌여 '역사를 지켜 물려준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내장산 일대를 국민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김생기 시장은 "국란을 당해 자신을 버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선비의 고장으로서 그 이야기들이 단풍의 경승과 함께 내장산에 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장산 4계절 관광지화는 정읍시의 오랜 꿈이었고, 선비와 의승들의 이야기는 가을 말고도 사철 국민들의 발길을 머물게 할 것이란 기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