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이 횡령해도 상장폐지될까 봐 쉬쉬

M&A전문가 박모씨는 지난해 말 코스닥기업 H사를 인수했다. 1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끌어와 잔금을 치르고 나니 여기저기서 부외부채, 추가부실이 발견됐다. 박씨는 "전 최대주주가 괘씸해 고발을 할까 생각했지만 횡령 이슈에 휘말릴 경우 내 손해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해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박씨가 고발을 포기한 이유는 상장폐지 실질심사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 횡령액이 자기자본의 5% 이상일 경우 상장폐지 실질심사에 들어간다. 만에 하나 상장폐지가 되면 투자자금의 대부분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다. 박씨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억울하지만 참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박씨와 비슷한 사례는 적지 않다. 최근에도 여러 코스닥기업에서 횡령 사건이 발생했지만 퇴출될까 두려워 신고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잇따르고 있다. 다만 이 때문에 투자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투자 기업이 속으로 멍들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속앓이하는 횡령 피해자들

상장사 K사에서는 대표이사가 회사 자산 일부를 챙겨 도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분도 이미 처분한 후였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경영권을 행사하는 이들이 가진 지분은 0%"라며 "지난해에만 최대주주가 수차례 바뀌었다. 사실상 만신창이 상태"라고 전했다. K사는 소형M&A 회사 사장 출신의 인사 한 명을 '비공식' 대표이사에 앉히고 회사 매각을 추진 중이다.

K사의 가장 큰 문제는 도망친 전 대표를 고발 없이 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당장 다음 번 회계 감사 때 구멍 난 자산을 어떻게 메울지 고민이다.

B사의 경우도 유사하다. B사는 경영진 간에 경영권 다툼이 벌어졌는데, 서로를 횡령범으로 신고하는 일은 자제했다. 역시 상장폐지가 두려워서다.

횡령으로 신고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 일부 부도덕한 이사들이 법인카드 사용을 남발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횡령한 인물이 도리어 "상장폐지되고 싶으냐"고 협박한 일도 있었다.

실제로 경영권 다툼 도중에 횡령 사실이 알려져 퇴출된 경우는 많다. 유진데이타는 전 최대주주 김모씨의 가장납입, 횡령 등이 알려져 실질심사 대상에 올랐고 결국 상장폐지됐다. 보광티에스, 씨앤에스테크놀로지, 파나진 등도 횡령으로 위기를 맞은 기업들이다. 하이마트는 유진기업과 선종구 회장 간 경영권 싸움이 벌어졌고, 회사 매각을 추진하는 와중에 선 회장의 횡령배임 혐의가 드러났다.

◇준법감시인제 강화 등 대책 필요

물론 횡령이 벌어지고 속으로 멍든 기업을 무한정 상장시켜 거래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거래소는 "일부 부작용이 있겠지만 내부 감시가 강화되면 점차 피해 사례가 줄어들 것"이란 입장이다. 공시팀 관계자는 "코스닥기업이 먼저 투명해져야 한다"면서 "횡령이 발생하더라도 주력사업에 문제가 없으면 배려해준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투자자 입장에선 언제 갑자기 횡령 공시가 터질지 모른다는 점이 큰 위험 요인이다. 현재처럼 기업들이 상장폐지를 우려해 횡령사실을 극구 감추는 상황이라면 회사 내부자들만 횡령을 알고 소액주주들은 모르는 정보의 불균형 사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내부자들이 주식 매도에 나설 경우 소액주주는 앉아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실적으로 코스닥기업이 내부 감시를 강화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한 금융감독 당국 관계자는 "소액주주 피해를 줄이려면 준법감시인제를 더 꼼꼼히 운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장폐지보다 횡령자 처벌 수위를 높이는 쪽으로 법을 고치고 회계법인이 감사에 더 적극적으로 임하게 하는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