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래한다, 그래서 청춘이다

김포의 번화한 도심에 있는 김포노인종합복지관. 길 건너 고층 아파트에 사는 김정암(103) 할아버지는 복지관에서 낮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평소 즐기는 민요를 장구 장단에 맞춰 노래 부를 수 있고, 그 옛날 동네잔치처럼 춤사위 한 줄 풀어놓을 수 있다. 계단을 한 개씩 올라 4층에 다다르면, 유산소 운동과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는 체력단련실이 있어 매일 운동도 한다. 60대부터 팔구십 먹은 젊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 한바탕 웃을 일도 꼭 생긴다. 그래서 김포노인복지관은 김 할아버지의 사랑방이다. 오늘도 김 할아버지는 15층 자택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200여 미터를 걸어 복지관에 간다. 지팡이를 가벼이 짚고서.

◇'1박2일 할아버지'로 소문

"이때가 아흔일곱일 때여. 그때랑 지금이 또 다르지?"

김 할아버지는 복지관 입구 유리문에 붙은 홍보지를 가리켰다. 표지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을 한참을 들여다보다 연신 혀를 끌끌 차고는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2006년 김포노인복지관이 개관될 때, 김포시의 최고령인 김 할아버지는 복지관을 대표하는 어르신이자 표지모델로 모셔졌다. 이후, 각종 행사 때마다 '김포시의 큰어르신'으로 자리를 빛냈고, 노래 한 자락을 결코 마다하는 법이 없어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됐다.

김 할아버지가 '김포시의 자랑'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한 것은 100세를 넘기면서다. 한번 외운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과 윗몸일으키기 20개를 너끈히 해내는 체력은 '건강한 100세인'의 새로운 지향점이 되었다.

빛깔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러닝머신 위를 걷고, 다소 무거운 헬스 기구를 가뿐히 다루는 모습이 전국에 방영되었다(2010 SBS 생방송 투데이). '허릿심이 없으면 죽치고 앉아있어야 한다'며 다리 들어올리기를 하는 모습에서 초고령자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 채소 위주의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 외에 생활태도에서 장수 비결을 찾는 프로그램(SBS 스페셜, '기적을 부르는 백세의 유머')도 김 할아버지를 주목했다. 뇌과학 연구소에서 촬영한 김 할아버지의 뇌는 60~70대가 가지는 뇌 상태로, '젊은 뇌의 원인'을 평소 유머가 많은 김 할아버지의 생활태도에서 찾았다. '유머를 이해하고,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뇌의 여러 영역들이 동시에 작용해야 하는데, 꾸준히 유머를 말하다 보면 뇌 활동이 활발해져 젊은 뇌를 가지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김 할아버지를 '스타 100세인'의 반열에 올린 것은 지난해 1박2일(KBS) 출연이 결정적이었다. 시청자 투어로 1세 아기부터 102세 김 할아버지까지 각 세대 시청자들이 1박2일 멤버들과 이틀간 여행을 다녀왔다. 전세버스에서 김 할아버지는 '남행열차'를 시원스레 불렀고, 판소리 한 자락과 같았던 '남행열차'는 인터넷에 오를 만큼 화제였다. 동네 아이들은 지금도 김 할아버지를 '1박2일 할아버지'라 부르면서 인사한다.

◇도시에서 인생 대부분 살아

김 할아버지는 도시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다.

"고향이 충남 금산 산골이지. 일본 놈들이 농사 지어 놓으면 다 뺏어가고 고생했지. 시방 젊은 애들은 몰라. 21살에 장가 가서 23살에 서울 왔어. (그때부터 쭉 살았으니) 서울사람이지 뭐. 그때 돈 15원 가지고 여기 왔는데, 15원이면 지금 돈으로 한 20만원 돈이지. (처음에) 영등포에 와서 자리 잡았는데, 시골에서 40전 하는 쌀이 (서울에서는) 50전 하더라고. 그래서 안양천 막는데 둑맥이 토목공 나가면 52전을 줘. 쌀 한 가마니 주지 뭐여. 6남매를 여기서 낳고 키우고 고생 많이 했지."

가죽공장·방죽회사·철공소 등 도시 노동자로 살아온 김 할아버지와 달리 맏아들은 고등과를 나와 시청 공무원이 됐다.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를 한 맏아들 내외는 이제 팔순이 됐다. 맏아들은 복지관에서 서예·일본어 등을 배운다. 이렇듯 건강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김 할아버지이지만, 자식 얘기를 꺼낼 때는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나온다. 26년 전 행방불명된 아들이다.

"삼사관학교 나와서 광주에 있었어. 월남전도 갔다 오고. 4살 먹은 아들(손자)이 지금 서른이 됐어도 안 들어오니. 어디 (사망자) 통계라도 있을 텐데…."

40년 전 사별한 아내 얘기까지 흘러가자, 김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고 탁자 밑에 깔린 연락망의 글자와 숫자를 나즈막이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아직 이게 다 보여."

김 할아버지는 평소 노래를 즐겨 부른다. 지난 23일 복지관 6주년 기념식에서 부른 '성주풀이' 역시 그의 애창곡이다.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 저 건너 잔솔밭에 솔솔 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 마라. 저 비둘기 나와 같이 님을 잃고, 밤새도록 님을 찾아 헤맸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흥겨운 노랫가락이 100년의 시간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