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연금은 안녕하십니까?] 노후 맡겼더니… 정기예금에 넣고 수수료 장사

직원 12명을 데리고 작은 회사를 운영하는 박모(40)씨. 작년 말 퇴직연금 가입을 권하러 온 은행 직원의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무래도 안정적이어야 하니 예금으로 굴리는 상품으로 하시죠. 4.7% 확정금리로 모실게요. 다른 예금보다 1% 정도 높은 겁니다."

이렇게 매달 177만원을 직원들을 위한 퇴직연금으로 부어오던 박씨는 "적립금에서 0.8%를 수수료로 뗀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됐다. 수익률이 실제로는 3.9%인 것이다.

현재 은행, 증권, 보험사의 퇴직연금 상품에는 330만명이 가입해 50조원이 투자돼 있다. 퇴직 후에 대비한다는 상품의 목적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포트폴리오로 투자돼야 한다. 단순히 안정성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곤란하다. 수익률이 지나치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떨까? 전체 퇴직연금의 절반 정도(24조원)를 운용하는 은행은 받은 돈의 92.3%를 정기예금에 맡기고 있다. 또 채권형 펀드에 4.6%, 금리확정형 보험에 0.9%, 주식형펀드에 0.2%, 혼합형 펀드에 0.2%를 맡긴다.

이에 비해 국민연금은 전체 자금 중 주식 투자 비중이 19.3%(올해 목표)에 이르고, 해외 투자와 부동산 투자 등 대체 투자 비중은 9.2%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채권 투자 비중은 63.4%로 축소할 예정이다.

사적 연금인 퇴직연금 같은 상품이 안정성만 강조해 받은 돈의 대부분을 정기예금에 맡기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다. 국민연금 고위 관계자는 "연금 운용에는 안정성과 수익성 간의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며 "지금과 같은 저금리 시대에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연금 운용기관이 돈을 정기예금이나 국채로만 굴리는 것은 공무원의 '복지부동'보다 더 나쁘다"라고 말했다.

물론 은행 퇴직연금 중 93.6%는 원리금 보장을 약속한 상품이라 안정성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하지만 안정성을 훨씬 중시해야 하는 국민연금 사례를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7개 시중은행의 원금보장형 퇴직연금 수익률은 평균 4.5%로 집계됐다. 물가상승률 4.0%를 웃돌아 비교적 양호한 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은행들이 여기서 수수료 조로 전체 적립금의 0.6~0.8%를 매년 떼가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에 가입한 기업 입장에서는 실제로 연 3.7~3.9%인 셈이다. 은행들은 이 과정에서 작년 한 해 동안 수수료로 1700억원을 거뒀다.

은행의 투자 실력은 퇴직연금 중 5.4%를 차지하는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운용 실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실적배당형은 주식 같은 위험자산 투자 비중이 높은데, 8개 은행 실적배당형 퇴직연금의 지난해 평균수익률은 -0.5%였다.

문제는 또 있다. 은행들은 퇴직연금 자금을 정기예금으로 굴릴 때 대부분 자기 은행의 예금에 넣는다. 요즘 산업계에서 거론되는 '일감 몰아주기'와 다를 게 없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8월에는 은행들이 퇴직연금을 자기 은행 정기예금에 넣은 비율이 99.8%에 이르기도 했다. 일감 몰아주기 논란이 일자 금감원이 70%로 줄이라고 창구지도에 들어가면서 줄긴 했지만, 지금도 90%대 초반으로 금감원은 추정한다.

김재현 상명대 교수는 "기업들이 퇴직연금으로 맡긴 돈을 은행들이 자기 몸집 불리기에 쓰는 것"이라며 "수수료 챙기고 자산(예금)까지 불릴 수 있으니 굳이 고수익을 낼 수 있는 다른 투자처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설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퇴직연금

기업이 회사 내에 적립했다가 퇴직자에게 일시금으로 주던 퇴직금제도를 바꿔 금융회사에 맡겨 퇴직금을 굴리게 하고 그 돈을 퇴직자에게 연금 형태로 지급하는 것이다. 원리금 보장 여부에 따라 원리금 보장형, 실적 배당형으로 나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