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세 독거 노인의 마지막 '딸' 11명이 지켰다

황씨는 딸들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홍)순자는 이쁜이." "(홍)표경이는 옛날 내 애인 닮았다." "(유)순옥아, 내일은 닭볶음탕 해먹자." 부녀(父女)의 대화는 끝이 없었다. 딸들은 중풍 후유증으로 팔이 떨려 숟가락질이 어려운 황씨의 식사를 가장 신경썼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황씨의 시신은 서울 성모병원으로 갔다. 황씨는 8년 전 딸들에게 "그동안 세상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놓고 갈 게 몸밖에 없다"고 했다. 딸들은 시신 기증을 권했다. '딸들이 말하는 거라면 두말 않고 따르겠다'며 흔쾌히 시신 기증을 약속했다.

딸들은 황씨가 생전에 유언처럼 남긴 말을 전했다.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월남해 한때는 김두한 조직에 들어가 주먹깨나 썼다. 나중에는 막노동, 아파트 수위, 고물상 등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다. 일가친척 하나 없다가 말년에 딸들 만나 누리고 살았으니 나는 참 복 받은 사람이다."

18일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성당에서 치러진 독거 노인 황모(87)씨의 장례 미사. 제단 앞에 황씨의 관이 놓였고, 신부의 축성(祝聖)이 있었다. 한쪽에는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딸들 일동'이라고 적힌 하얀 국화가 놓였다. 6·25 때 월남한 황씨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이날 성(姓)이 다른 딸 11명이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16년 전부터 황씨를 돌본 재가관리사들이다. 1996년부터 서울시가 선발한 재가관리사는 거동이 불편한 독거 노인이나 장애인을 찾아가 청소·식사·목욕·검진 등을 돕는다.

상주(喪主)는 김옥진(63)·김옥희(59)씨 자매가 맡았고, 나머지 9명의 딸은 황씨가 사망한 지난 17일부터 밤늦도록 빈소를 지켰다. 김옥희씨는 1996년 3월부터 황씨를 돌봐온 최고참이다. 김씨는 '아버지'를 처음 만난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1평짜리 방을 기억했다. "아버지가 키 1m80㎝에 몸무게가 100㎏ 정도다. 방이 좁아 가로로 누워야 하고 중풍으로 오른쪽 손·발을 잘 못 쓰면서도 호탕하게 웃는 모습에 반했다."

김씨는 황씨를 보면서 1974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떠올랐다. 체격이나 성품이 흡사했다. 함께 재가관리 일을 하던 친언니 옥진씨에게 "아버지 삼자"고 했다. 자매는 정해진 날이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황씨를 찾았다. 옥진씨는 작년에 재가관리 일을 그만두고도 황씨를 챙겼다. "명절에는 쓸쓸히 보내실까봐 항상 집으로 초대했고, 봄이면 가족끼리 벚꽃놀이도 갔다. 우리 애들이나 손자들도 친할아버지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