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지휘자

지휘자 최수열(33)씨는 아버지인 작곡가 최동선 전 서울시립대 교수 덕분에 대여섯살 적부터 현대 음악회에 다녔다. 고전파나 낭만주의 작곡가를 훌쩍 뛰어넘어서 처음부터 실험극이나 창작 음악 초연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소년 최수열은 음악회에서 언제나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렸고, 뾰로통한 그의 표정은 가족 사진첩에도 그대로 담겼다. 최씨는 "음악회에 가기 위해 정장을 입으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현대음악이 마냥 싫었던 소년이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로 자라난 것도 유쾌한 역설이다. 고교 1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는 김동률의 가요에 더욱 이끌렸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억지로 하는 음악이 싫어서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서재 바닥에 뒹굴고 있던 잡지 부록 음반이 그의 삶을 뒤흔들었다. 모차르트의 호른 협주곡 1번이었다. 지휘자도 연주자도 제대로 표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청명하면서도 부드러운 호른의 음색은 그를 대번에 사로잡았다. 최씨는 "고전을 건너뛰어 곧바로 현대음악부터 들었던 게 실수 같았다. 다시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했다.

며칠 뒤 그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배움을 청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는 자신이 번역한 화성학 책을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날 밤부터 최씨는 그 책을 보고 실습 문제를 풀어 아버지의 서재에 올려놓았다. 다음 날 아침이면 온통 빨간 펜으로 수정해놓은 노트가 최씨의 책상 위에 어김없이 놓여 있었다. 부자(父子) 사이에 무언(無言)의 음악 교육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버지가 최씨의 '빨간 펜 선생님'이 된 셈이었다.

그 뒤 최씨는 지휘로 방향을 돌렸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드레스덴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올해 고양아람누리(4월 26일)와 서울시향(5월 3~4일), 성남아트센터(9월 20일)와 예술의전당(10월 11일)에서 오전 11시부터 열리는 마티네 콘서트의 지휘자로 잇따라 초대받아 '아침을 깨우는 지휘자'로 불린다. 그는 "공연장마다 아침 음악회가 활성화되면서 젊고 경험도 부족한 제게도 기회를 많이 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줄곧 겸손한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이 젊은 지휘자가 감춰놓은 또 하나의 무기가 바로 현대음악이다. 2010년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악단인 앙상블 모데른에서 젊은 음악가들에게 교육과 실습의 기회를 주는 아카데미의 부지휘자로 1년간 활동했고, 올해는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인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한다. 서울시향 상임작곡가인 진은숙의 추천으로 오는 9월에는 오스트리아의 슈바츠 현대음악 축제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최씨는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예프·쇼스타코비치 같은 러시아 작곡가와 드뷔시 등 악기의 매력을 잘 살려낸 20세기 작품들에 관심이 많다. 그는 "모두가 반드시 잘해야 하는 분야(고전 음악) 못지않게 나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현대음악)도 중요하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재미가 크다"고 말했다. 10대 시절 음악 스승이었던 아버지는 지금도 아들의 음악회가 열리면 말없이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돌아가신다고 했다. 그는 "서재에 가득 쌓여 있는 아버지의 작품을 언젠가 제대로 공부해서 연주하고 싶은 꿈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