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죽마고우 도노호(영국 피아니스트)와 래틀(베를린 필 지휘자)

돌아보면 세상만사 인연(因緣)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음 달 내한 공연을 앞둔 영국의 중견 피아니스트 피터 도노호(59)는 1992년 미국 투어 도중 신시내티의 호텔에서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호텔 유리창이 깨지면서 피아니스트에게는 치명적인 왼손 검지의 신경과 동맥 일부를 베이고 만 것이지요. 도노호는 전화 인터뷰에서 "마침 세계적인 신경외과병원이 근처에 있어서 제때 치료를 받았지만 자칫 손가락을 못 쓸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당초 도노호의 연주회 티켓을 예매했던 외과 의사는 사고 직후에 연주자의 수술을 맡는 집도의가 됐지요. 도노호가 무사히 완치되고 2년 뒤 다시 신시내티를 찾았을 때 이 의사는 연주회는 물론이고 뒤풀이까지 참석했다고 합니다.

1982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공동 2위에 입상했던 도노호는 청소년 시절 피아노와 비올라·튜바까지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만능 음악인이었지요. 이 때문에 도노호는 '독주자로 홀로 여행하면서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음악가와 함께 일하는 편이 음악을 바라보는 지평을 훨씬 넓혀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실제 머지사이드 청소년 오케스트라와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에서 타악기 주자로 활동했던 그가 10대 시절에 만났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현재 베를린 필을 이끄는 지휘자 사이먼 래틀(57)입니다.

두 살 차이 도노호와 래틀은 청소년 교향악단에서 나란히 타악기를 연주했지요. 19세 때 래틀이 머지사이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연주했을 때 팀파니 주자가 도노호였습니다. 그는 "우리는 모두 영국 북부 출신인 데다 어릴 적 타악기를 연주했고, 나이까지 비슷해서 공통분모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래틀이 25세에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면서 이들의 음악적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1981년부터 도노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거슈윈과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2번 등 해마다 단골 협연자로 초대받았고, 래틀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동료가 되었지요.

1987년 이 악단의 단원들이 주축이 된 버밍엄 현대 음악 그룹의 창단 연주회에서는 도노호가 직접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도노호가 영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와 현대 음악을 비롯해 160여곡의 광범위한 협주곡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것도 이처럼 다채로운 음악적 배경 덕분입니다.

2002년 래틀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자 도노호는 기념 연주회에서 올리비에 메시앙의 작품을 협연했습니다. 당초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음악을 시작했던 영국의 소년들이 30년 뒤에는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협연자로 모두 성장한 셈입니다. 동화 같은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삶에서 소중한 존재는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요.

▲피터 도노호 초청 피아노 연주회, 5월 3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독주회), 1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피아노 협연), (02)581-5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