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母乳의 힘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머리 밀며 쪽쪽 빨아대는 아기

내 아이가 맞는 첫 번째 봄날 따뜻한 젖 물릴 수 있는 건 행복

'치유의 양식' 먹이려 애쓰는 엄마들이 여유로운 세상 되길"


냉장고의 냉동실을 열 때마다 흠칫하고 놀란다. 하이힐을 신은 것처럼 요염하고 뾰족한 돼지족 때문이다. 냉동실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한 돼지족은 연초에 둘째 아이를 낳은 딸을 위해 부모님이 사 오신 것이다. 돼지족을 먹으면 젖이 잘 돈다고 삶아 먹으라는데 차마 엄두가 안 나서 아직 구경만 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부터 내 몸은 최상의 모유(母乳)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동안 내 안에 들어간 미역을 쭉 펼쳐 놓으면 수영장 절반은 채울 것 같다. 다행히 아기도 엄마의 정성을 아는지 내 젖을 진수성찬처럼 맛있게 먹어주고 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신비로움을 느낀다. 아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엄마 젖을 찾아 머리를 들이밀며 힘껏 입술을 쪽쪽거린다. '젖 먹던 힘까지!'라는 구호는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잘 만들었다. 정말이지 '젖 먹던 힘'만 돌이킬 수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엄마에게나 아기에게나 모유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모유 수유(授乳)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항상 엄마가 아기 옆에 붙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한번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긴장해야 하고 나가더라도 대개 수유실이 있는 마트나 백화점을 찾게 된다. 자연히 바깥 행사를 되도록 피하게 되는데 바야흐로 꽃놀이의 계절에 어떻게 집에만 있을 수 있겠는가. 길어야 열흘인 이 황홀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얼마 전 무조건 유모차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벚나무는 팝콘처럼 탐스러운 하얀 꽃을 피우기 전이었지만 상춘객들 마음에는 이미 꽃이 만발해 있었다. 나 역시 겨울 내내 몸조리한다고 집에만 있었던 터라 봄볕 한 줌에도 황송할 지경이었다.

"엄마, 꽃들도 동생이 좋은가 봐. 유모차를 따라오네."

아들은 유모차 바퀴에 달라붙은 노란 개나리만 봐도 좋은지 까르르 웃었다. 아들은 동생과 외출을 나온 것이 뿌듯해서인지 자기가 유모차를 밀겠다며 수선을 피웠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을 보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 아들도 살피랴 조심조심 유모차를 밀자니 손이고 발이고 정신이 없었다. 인파들 사이로 떠밀려 걷다 보니 이게 꽃구경인지 사람 구경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나도 지치고 배가 고픈데 아기는 오죽했을까. 갑자기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입술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아기가 곧 혀를 날름거리며 밥을 달라고 힘차게 울어대는 바람에 부랴부랴 유모차를 돌려 자동차로 돌아왔다. 엄마야 진땀을 흘리건 말건 아기는 배불리 속을 채우더니 넉살 좋게 배시시 웃었다.

"엄마, 동생이 꽃을 처음 봐서 기쁜 거야."

아들 말이 맞았다. 이 아이에게는 인생에서 처음 보는 꽃이요, 처음 맞는 봄이었다. 행복한 아기 얼굴을 보자니 '그래, 딴 게 꽃구경인가. 이게 꽃구경이지' 싶었다. 내 아이가 맞이하는 첫 번째 봄, 그 기적 같은 날에 따뜻한 젖을 물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첫째 아이 때는 몰랐는데 요즘 힘들긴 해도 아기를 곁에 두고 일할 수 있는 내 직업에 고마움을 느낀다. 더불어 직장 다니는 엄마들의 노고를 새삼 칭송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야 하루 종일 따뜻한 방에 누워 아기와 눈을 맞추면서 뒹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가. 턱없이 부족한 출산휴가를 마치고 아침마다 전쟁을 치르며 아기와 생이별을 하는 엄마들은 직장 창밖의 목련 봉오리만 봐도 하얀 아기 얼굴이 떠오를 것이고 밥공기의 따뜻한 밥알만 봐도 아기가 무얼 먹고 있을지 걱정될 것이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틈을 쪼개 회사 한쪽에서 유축기로 모유를 짜내는 엄마들의 부지런함은 정말 존경스럽다. 휴게실이 마땅치 않은 직장에 다니는 엄마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유축기로 젖을 짜다 우유통을 변기에 빠뜨리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눈물겹다.

좋은 것만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게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내가 엄마가 되어서야 깨달으니 참 늦되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준 엄마의 젖이 어떤 맛이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살면서 까맣게 잊고만 그 맛은 "에고, 이게 뭔 맛이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단순 결백한 단맛이다. 엄마 뱃속에 열 달 동안 힘들게 있었던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엄마 젖은 그렇게 달고, 앞으로 무수히 인생의 쓴맛을 맛볼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 엄마 젖은 그렇게 단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약이 아닌 음식으로 몸을 치유한다는 '힐링푸드'의 원조는 모유가 아닐까 싶다. 모유가 됐든 분유가 됐든 엄마들이 준비하는 음식은 다 '힐링푸드'일 것이다. 아이를 낫게 하고 살찌게 하는 엄마의 양식을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는 '일하는 엄마'들에게 한결 여유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봄에 희망으로 피어나는 모든 아기들을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