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클래식] 유길준의 '조선 개혁설계도', 그 開化는 아직도 진행중

1884년 겨울, 미국 동부 덤마고등학교에서 유학하던 유길준은 친구로부터 신문을 건네받았다. 갑신정변 기사였는데 주동자는 체포되었거나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성질 급한 천재 김옥균이 급기야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겨울밤은 길고 추웠다. 유길준은 밤새 몸을 뒤척였다. 이듬해 봄, 29세의 유길준은 귀국길에 올랐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수에즈 운하, 싱가포르, 홍콩을 경유하는 먼 항로였다.

당시 조선인으로 세계 국가들을 두루 돌아본 사람은 없었다. 유럽은 개명천지였다. 런던 의사당에서 유길준은 입헌군주제의 강력한 힘을 느꼈다. 프랑스 파리에서 그는 웅장한 건축과 장려한 문화, 신묘한 기계문명에 압도됐다. 독일·스페인·네덜란드의 외양과 문화교류의 역동성이 함포 앞에 문호개방을 겨우 허용한 조선에 겹쳐졌다.

잠자는 조선을 깨워 문명의 바다로 나오게 하는 방법이 묘연했다. 박규수의 문하생들과 결성한 개화당은 대역죄인으로 몰렸고, 열강의 진출에 당황한 조정 사대부들은 전통적 교린질서에 안주해 속속 친청파로 투항했다. 근대의 격랑 속에서 중국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었다. 안하무인 원세개의 전횡을 이겨내고 주권국이 되려면 '중심의 부정'이 전제돼야 했고, 국력과 민력 배양의 필수적 통로인 '문명개화'를 통과해야 했다. 자주독립과 문명개화는 개화당의 유일한 생존자 유길준에게는 개혁설계도의 원점이었다. 그런데 귀국과 동시에 가택연금형을 언도받은 그에게는 길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에게는 글이 길이었다. 가택연금 이년째, 백록동(현 자하동) 취운정으로 옮긴 유길준은 오랜 구상을 글로 실체화하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의 개혁설계도인 '서유견문'은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일본 경응의숙에서, 미국 고등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정보를 종합하고, 일본 신사유람단, 미국 보빙사 체험과 견학 기록, 유럽 여행에서 담아 온 기억들이 전부였다. 청년 유길준의 기억창고에는 작은 도서관 하나를 꾸릴 만한 분량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근대를 향한 이 귀중한 정보와 지식은 유길준의 본바탕인 성리학적 프리즘을 통과해 나왔다. 그의 스승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역작인 '서양사정'(1866)과 다른 점이었다. 조선의 사대부가 최초로 국한문혼용체로 쓴 이 획기적인 저술은 탈고 6년 뒤인 1895년 일본 교순사에서 간행됐다. 이후 대한제국의 개혁관료들과 애국계몽운동에 나선 지식인들은 대개 이 책 주변을 맴돌았다.

지구세계의 개관과 천체 우주의 구조를 책머리에 쓴 것은 어린 시절 보았던 '해국도지'의 영향이었다. 세계 지도 위에 중국을 상대화하면 속방 조선은 만국공법이 명시한 바의 주권국으로 전환한다. '아국의 권리'가 첫 주제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조선을 포함해 모든 국가는 내치와 외교의 주권을 갖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요즘엔 상식이 된 이 간단한 명제가 당시엔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것이었는지. 두 번째 주제가 '인민의 권리.' '귀천에 관계없이 모든 인민은 자유와 통의(通義)라는 권리를 갖는다.' 수분공역(守分供役)의 의무만 인정됐던 봉건 조선에서 천부인권설이 제창된 것이다. 국가와 인민, 인민 간의 권리쟁투는 법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소위 근대적 '법치주의'를 고종 치하에서 그것도 역모죄인이 과감하게 천명했다. 법과 도덕은 국가와 인민을 관할하고 품격을 높여주는 공도(公道)이자 문명개화로 가는 문이다. 입헌군주제의 조선적 형태인 군민공치(君民共治), 열강의 각축을 우회하는 중립국안 등이 모두 청년지식인의 고뇌에서 비롯됐다. 반개(半開) 상태인 조선을 문명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가장 절실한 과제는 무엇보다 '인민의 교육'이었다. 유길준이 만년에 교육사업에 매진한 이유이기도 하다. 1895년 고종의 교육 유시가 반포되고 학교건립 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던 것도 '서유견문'의 영향이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합으로 그의 일본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도덕, 재예, 공업교육을 통한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론(厚生論)은 실력양성론의 기초가 되었다.

이 책이 쓰인 후 120년 동안 한반도는 유길준이 상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겪었다. 미·중·일·러의 감시력이 여전히 작동하는 분단의 경계선 내에 두 개의 정부가 대치 중이고,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서유(西遊), 개명(開明)한 사람은 수천만배로 불어났지만 '완전한 독립'은 아직 요원하고, 민력 배양과 상생 공도를 향한 실상(實狀) 개화는 진행 중이다. 1914년 경기도 광주 검단산 기슭에 묻힌 유길준은 21세기 개혁도, '신서유견문(新西遊見聞)'을 쓸 청년들을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서유견문' 140자 트윗독후감]

"(나라 A) 와 (나라 B)에서 유학한 최초의 조선 청년인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 C)의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온 조선개혁 설계도이다." 정답은 미국, 일본,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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