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문학산책] 誤答을 베끼는 군중 속에서 正答을 찾는 소설가

올해는 소설가 김승옥이 등단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으로 등단한 김승옥은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작품들로 1960년대 한국 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작가가 됐다. 올해 일흔한 살인 그는 지금도 '1960년대 작가'로 불린다. 1970년대부터 사실상 소설 창작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문단을 떠난 그는 기독교에 귀의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느라 신작 소설을 발표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그는 예순두 살에 뇌경색으로 쓰러진 탓에 자유롭게 말을 하지 못해 필담(筆談)으로만 대화가 가능하다.

김승옥은 삼십 년 넘게 신작을 못 썼지만, 묘하게 문단에선 '잊힌 작가'가 아니다. 베스트셀러 '엄마를 부탁해'의 신경숙을 비롯해 김승옥 소설을 공책에 손으로 베끼면서 습작을 한 후배 작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가 문학청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도 대단하다. 얼마 전 김승옥 등단 50주년을 맞아 후배 문인들이 마련한 그의 작품 낭독회도 열렸다. 작가의 대표작에 후배들이 쓴 글을 곁들인 문집 '서울, 1964년 겨울'도 나왔다.

김승옥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은 그해 겨울 서울의 한 선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세 사내의 이야기다. 셋 중에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들이 나누는 대화는 하찮고 사소한 언어유희로 꾸며졌다. 전쟁 체험이 지배한 1950년대 소설은 개인보다 집단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말투도 엄숙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비해 김승옥 소설의 새로움은 개인을 가족과 사회에서 분리시켜 경쾌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고독과 소외를 관념이 아닌 감성으로 다루고, 이미지를 사용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기법도 당시로선 새로웠다. 그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촌스럽지가 않다.

김승옥이 일찍부터 개인의 탐구에 눈을 뜬 계기는 전남 여수에서 보낸 초등학교 2학년 때 겪은 여순반란 사건이었다고 한다. 어린 김승옥은 어른이 되면 저렇게 서로 총을 쏴서 죽고 죽이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는 학교에서 숙제를 받았다. '공자가 수레를 타고 가는데 길에서 흙 놀이를 하던 아이가 공자에게 호통을 치면서 수레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했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를 쓰라'는 숙제였다. 어린 김승옥이 답을 못 쓰자 중학생인 사촌형이 '아이가 대담합니다'라고 쓰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몰려와 답을 베껴 썼다. '대담'이란 말을 잘 몰랐던 아이들은 한결같이 '아이가 대답합니다'라고 틀리게 썼다. 어린 김승옥은 그때 인간에 대해 깨쳤다고 한다. 군중 심리에 빠지면 오답(誤答)도 자연스레 베낀다는 거였다. 여순반란 사건에 휘말린 어른들도 '오답을 쓰면서도 속으론 정답(正答)을 쓴다고 착각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김승옥은 외톨이로 책만 읽다가 소설가가 됐다고 한다. 오답을 베끼는 군중 속에서 정답 찾기가 김승옥 문학의 기본바탕이었다는 얘기다.

김승옥 소설의 '개인 탐구'에는 이처럼 시대의 아픔이 배어 있다. 요즘에도 정치·사회적으로 엉뚱한 오답이 군중을 거쳐 정답인양 돌아다니는 일이 너무 잦다. 이렇게 오답이 사람 잡는 상황은 개인의 자기 세계가 허약한 사회에서 언제든지 되풀이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김승옥 소설의 개인 탐구는 요즘 세태를 되돌아볼 때도 뜻하는 바가 크다. 또한 김승옥 소설의 청년상(靑年像)이 요즘 청년 세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슬픈 일이다. '서울, 1964년 겨울'에 나오는 스물다섯 살 청년들의 대화에는 소통이 없고, 독백(獨白)의 평행선만 펼쳐진다. 둘 다 무기력하고 미래 전망이 없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김승옥 소설이 지금도 새롭다면, 그것 또한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동인문학상을 탄 김승옥은 해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한다. 젊은 후배 작가들이 상을 받는 순간을 말없이 지켜본 뒤 시상식 뒤풀이엔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시상식을 찾은 김승옥과 잠시 필담을 나눴더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했다. 그가 젊은 날에 쓴 단편을 시나리오로 옮기는 중인 듯했다. 그는 어눌한 목소리로 '고마워' '친구' '사랑' 같은 말은 애써 제대로 발음한다.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라고 남에게 일깨워주는 듯하다.

영원한 청년작가 김승옥은 지금도 "소설을 안 쓴다"곤 안 한다. '김승옥 신작설(新作說)'은 1980년대 이후 늘 오답으로 끝났다. 이젠 등단 50주년을 맞은 작가가 정답을 내놓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