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벌써 4번째 결승전… 싸우다 정든 선후배

승부세계엔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상대가 있다. 대표적 커플 중 하나가 이세돌과 박영훈이다. 지금까지 중요한 길목에서 무려 32번이나 맞닥뜨렸다. 싸우며 정이 들었는지 사이가 꽤 좋은 선후배로 꼽힌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결승카드가 결정되자 둘은 눈빛부터 달라졌다. 25일 결승 5번기에 돌입하는 제17회 GS칼텍스배가 이번 무대다. 18일 밤 벌어졌던 준결승서 박영훈은 강동윤을, 이세돌은 박정환을 따돌렸다. 이번 결승이 끝나고 나면 타이틀 지형과 랭킹은 또 한 번 거세게 용틀임할 것이다.

이세돌은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한국 최고의 스타다. 무려 26개월째 국내 톱랭커 자리를 지키면서 매달 신기록을 스스로 경신해가는 중이다. 박영훈도 만만치 않다. 올해 24승 6패로 국내 프로기사 268명 중 다승 1위를 질주하고 있다. 둘의 이번 만남은 우연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조금 파고들면 둘에게도 그늘이 있다. 이세돌의 올해 전적은 9승 4패. 그 4패로 바둑왕전 십단전 맥심배 등의 전적표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특히 '큰 먹잇감'인 비씨카드배에서 중도 탈락, 2연패(連覇) 꿈이 좌절된 아픔이 컸다. 박영훈 역시 11연승을 달리다 비씨카드배 8강전서 천추의 한이 될 역전패를 당했다. 이번 결승전의 콘셉트는 그래서 오월동주(吳越同舟)이자 동병상련(同病相憐)이다.

패권을 건 대결은 이번이 통산 네 번째. 2001년 제1회 바둑TV배 결승서 처음 우승을 다퉈 이세돌이 2대0으로 완승했다. 2007년 말부터 이듬해 초에 이르는 약 3개월 사이 둘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의 연속 쟁기(爭棋)를 펼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제12회 GS칼텍스배서 도전자 박영훈이 2연패 후 3연승의 드라마를 쓰며 타이틀을 채가자, 곧장 이어진 제12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선 이세돌이 2대1로 신승했다.

둘은 국제대회 '골목길'서도 유독 자주 만났다. 삼성화재배 결승 이후에도 제13회 LG배 4강전, 1·2회 비씨카드배 8강전, 제16회 LG배 32강전 등서 번번이 칼을 섞은 것. 오죽했으면 16회 LG배 첫판 추첨 때 17분의 1 확률을 뚫고 자신을 뽑아든 박영훈을 향해 이세돌이 "내가 그렇게 좋으냐"며 푸념했을까.

통산 32합을 겨뤄 이세돌이 19승, 박영훈이 13승을 기록 중이다. 2008년 이후 마지막 4년간 이세돌이 6승 2패로 앞서면서 균형이 깨졌다. 하지만 최근의 초단기적 성적만 본다면 박영훈의 컨디션이 앞서 결과를 점치기 힘들다. 또 하나의 변수는 올해부터 제한시간 10분, 40초 초읽기 3회의 속기(速棋)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것. 누가 더 집중해 실수를 최소화하느냐가 승부의 열쇠란 분석이 나온다.

이세돌은 랭킹 1위를 향해 바짝 따라붙던 2위 박정환과의 준결승서 놀라운 평정심으로 완승했다. TV해설을 맡았던 박정상 九단도 "승부처마다 이 九단이 보여준 냉정함이 승부를 가른 요인"이라고 했다. "워낙 강한 상대인 만큼 편한 마음으로 두겠다"는 박영훈의 말은 어디까지가 본심인지 알 수 없다. 이세돌이 인파이터, 박영훈은 아웃복서로 다른 과(科) 맹수끼리의 대결이란 점도 흥미롭다.

GS칼텍스배는 두 기사 모두 과거 한동안 지배 경험이 있었던 땅이다. 이세돌이 7기와 11기를, 박영훈이 12기와 13기를 제패했다. 고토(故土)회복과 지위 격상의 열망에 비한다면 7000만원이란 우승상금은 목표순위가 한참 처지는 단순 전리품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