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의 사이언스 카페] 여성의 휴대폰 통화에서 '인류 진화'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오늘도 길을 가면서, 또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쉴 새 없이 전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이동통신'이란 말 그대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누군가와 항상 연결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은 누구와 통화를 하는 것일까.

과학은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인류학자인 로빈 던바(Dunbar) 교수는 한 사회에서 성별(性別)과 나이에 따라 누구와 가장 많이 통화하는지 안다면 개인의 유대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던바 교수는 지난 19일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의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유럽 한 국가를 대상으로 320만명의 휴대폰 사용 패턴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들은 그 나라 전체 휴대폰 사용자의 20%를 차지했으며 남자가 180만명, 여자가 140만명이었다. 연구진은 7개월간 이들이 사용한 19억5000만 통의 통화와 4억8900만 건의 문자 메시지가 누구에게 갔는지를 분석해, 한 사람이 가장 자주 통화한 순서대로 3명을 추려냈다.

일단 남녀 모두 20~30대의 젊은 층이 가장 많이 통화한 사람은 같은 연령대의 이성(異性)이었다. 예상대로 젊을 때 통화 1순위는 배우자나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 비율이 가장 높은 나이는 남성은 32세, 여성은 27세였다. 현대인의 결혼 적령기와 일치한다. 그런데 1순위의 지속 시간은 남녀에 따라 크게 달랐다. 여성의 '남성 1순위' 현상은 14년간 이어졌지만, 남성은 그 기간이 7년에 그쳤다. 여성이 남성보다 두 배 더 오래 이성과의 사랑에 집중한 셈이다.

그런데 50대가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이제 여성의 통화 1순위는 한 세대 어린 여성으로 바뀌었고, 이전의 1순위이던 같은 연령대 남성은 2순위로 밀려났다. 3순위는 한 세대 젊은 남성이었다. 연구진은 1순위가 딸이고, 2순위는 배우자, 3순위는 아들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비해 남성의 통화 1순위는 같은 연령대의 남녀가 비슷하게 비율로 나타났다. 이들은 배우자나 사회생활의 동료로 해석된다.

 

던바 교수는 여기서 인류 진화를 이끌어온 여성의 고귀한 생물학적 본능을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여성의 통화 1순위가 배우자일 때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모든 일에 우선시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40대 중반이 지나면서 여성은 이제 자신이 아이를 낳기보다는 새롭게 아이를 낳을 시기가 된 다음 세대의 여성, 즉 딸을 지원하는 데 모든 관심을 쏟는다. 이때 통화 1순위가 딸로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와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독특한 모습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바로 여성의 이른 폐경(閉經)이다. 여성의 수명은 70세 이상이지만 50세 전후부터 생식능력이 급격히 퇴화하기 시작해 60대가 되면 완전히 상실한다. 동물세계에서 암컷이 죽기 직전까지 자손을 낳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과학자들은 먼저 인간은 자립하는 데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 주목했다. 침팬지는 젖을 떼자마자 제 힘으로 먹이를 구하지만, 인간은 젖을 떼고 나서도 길게는 20년 넘게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만약 여성이 다른 동물들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아이를 낳으면 먼저 태어났든, 나중에 태어났든 그 자식이 독립할 때까지 제대로 보살피기 어렵다.

아이가 다 자라고 나서 다시 아이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노산(老産)은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보다는 그동안 터득한 생활의 지혜를 가지고 나보다 젊고 나의 유전자를 가진 여성, 즉 딸을 도우는 것이 후손을 퍼뜨리는 데 더 유리하다. 영국 셰필드대의 비르피 루마(Lummaa) 교수는 2004년 '네이처'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여성의 이른 폐경은 할머니들이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번성시키는 방향으로 몸이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른바 '할머니 가설(假說)'이다.

그동안 할머니 가설에 대한 증거는 원시부족이나 18~19세기 전통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현대사회에도 할머니 가설이 통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던바 교수는 휴대폰 사용 패턴을 통해 이를 입증한 것이다. 그는 곧 다양한 문화권의 휴대폰 통화 패턴을 분석한 연구결과를 발표할 예정인데, 문화에 상관없이 여성의 통화 1순위 변화는 비슷하게 나타난 것으로 알려졌다.

중년에 접어든 많은 남성이 "아내가 결혼 초기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안부를 묻더니, 요즘엔 아이만 챙기고 모른 척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아내의 '변심(變心)'은 후손을 위한 고귀한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정의 달' 5월은 이처럼 가정을 만들고 이어가게 해준 아내와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드려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