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입고 들어선다… 한옥이 빛에 물든다

한여름 장대비 마냥 굵은 봄비가 이어지던 26일 서울 가회동 178번지 '한씨 가옥'. 빗방울을 이기지 못해 아이 손만한 목련꽃잎이 뚝뚝 떨어진다. 낙하하는 꽃비 사이로 지우개만한 크기의 불빛이 1부터 9까지 숫자를 반복하며 하염없이 깜빡인다. 한옥 대들보엔 숫자 모양 조명이 길게 늘어뜨려져 순차적으로 점멸한다. 한복을 입은 관람객이 불빛의 조용한 향연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49·사진)씨가 일본 작가 미야지마 다쓰오(宮島達夫)를 초청해 27일부터 6월 30일까지 함께 여는 설치 전시 '한옥을 찾아 떠나는 시간 여행(House Lives With Time)'의 한 장면이다.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의 한복을 만든 국내 정상급 한복 디자이너이다. 미야지마 다쓰오는 숫자가 깜빡이는 LED 조명을 통해 동양의 윤회사상과 첨단기술을 접목했다는 평을 받는 세계적인 설치 작가다. 두 사람의 작품이 한옥을 무대로 펼쳐진다. 한옥 역시 예사롭지 않다. '한씨 가옥'은 조선 정조 때 병조판서 최주보가 소실 한씨에게 지어준 집. 서울시 민속자료 제14호이다. 현재 '동양레저'에서 소유하고 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관에서 하는 한복 전시는 늘 구색을 맞추려고 비빔밥처럼 끼워넣는 식이에요. 영화 보기 전 성의 없이 트는 CF 느낌이랄까요. 한복을 보는 사람도 진지하지 않고 준비하는 사람도 진정성이 우러나오지 않죠."

이날 한씨 가옥에서 만난 김씨는 한복·한옥·예술작품이 삼위일체된 전시를 기획한 의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순간에 단편적으로 한복만 보여주는 행사는 신물 났어요. 종합예술로 한복을 진지하게 바라볼 기회를 고민하다 협업을 통한 설치예술이라는 방식을 택했지요." 김씨의 품이 꼭 맞는 짙은 주황 재킷과 같은 색 스웨이드 로퍼(낮은 신발)가 전통을 대하는 그의 현대적인 자세를 말해주는 듯했다.

관람 형식이 이채롭다. 관람객들이 김씨가 만든 장옷(쓰개치마의 일종)과 도포 등 한복을 입고 한옥을 돌아다니며 작품을 구경한다. "사실 나는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을 위해 한복을 만들어 왔어요. 보다 많은 대중이 한국적인 환경에서 한복을 체험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많은 작가 중 미야지마 다쓰오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일본 나오시마의 한 폐가(廢家)에 설치된 그의 작품을 보고 반했어요. 계속되는 숫자의 반복을 통해 영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죠. 정적(靜的)이고 동양적인 사상이 폐가나 다름없었던 이 집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사람의 발길이 끊긴 채 '잠들어 있는 한옥'에 관람객을 통해 사람의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라는 얘기다. 관람객 자체가 설치 작품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

얼핏 보면 전시 주인공이 미야지마의 작품인 것처럼 같지만 티 나지 않게 김씨 작품이 스며 있다. 규수방 벽엔 김씨가 만든 여인의 저고리와 미야지마의 조명으로 만든 노리개가 함께 횟대(옷걸이의 일종)에 달렸다. 방에 깔린 보료도 그의 작품이다.

김씨는 회색 도시에 사는 우리의 아이들이 전시를 많이 봤으면 한다고 했다. 어린이용 한복까지 준비해뒀다. "한복을 늦게 시작했는데(이벤트 사업을 하다 서른 중반에 이 길로 들어섰다)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어린 시절 사대문 안에 살며 시각적인 추억을 쌓은 게 도움이 됐답니다. 아이들이 우리의 넉넉한 공간과 전통적 심미안을 경험했으면 해요."

김씨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한글·한식 등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라고 했다. "숭례문이 완공되면 숭례문이 따뜻하게 우리 가슴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프로젝트를 계획 중"이라며 구체적인 진행사항에 대해선 "비밀"이라 했다. 목~일요일에 관람할 수 있고 어른 5000원, 어린이 3000원. 예약문의 (02)2252-2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