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깡패" 외쳤던 獨 소년 한국에서 책으로 복음을 전하다

◇"아녜요, 히틀러는 깡패예요"

독일 남부 뉘른베르크에서 자란 임 신부의 아버지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다. 철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전후해 나치당을 탈당했다. 나치 치하에서 그의 가족은 궁핍했다. "어느 날 초등학교 교실에 십자가 대신 히틀러 사진이 걸렸어요. 선생님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으시더군요. 대뜸 '히틀러는 깡패' '독일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고 외쳤지요. 나중에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와서 '아이뿐 아니라 가족 모두 수용소로 갈 수 있다'며 걱정해 주시더군요." 소년은 성장해 베네딕도회에 입회해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는 신부가 됐다. 하지만 "아프리카보다 한국이 더 가난하다"는 얘길 듣고 주저 없이 한국으로 왔다. 수도원은 독일어·영어와 함께 한국어까지 능통한 그에게 출판사를 맡겼다.

25일 강남성모병원. 병상의 독일인 노(老)신부는 책 한 권을 들고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제목은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분도출판사). 1966년 한국에 온 뒤 평생을 '출판·미디어 선교사'로 헌신해온 임인덕(林仁德·78·독일 이름 하인리히 로틀러) 세바스티안 신부, 본인의 일대기다. "처음부터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베네딕도회가 북한의 덕원수도원 시절부터 한국말로 가톨릭 서적을 펴내며 고생한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천주교 베네딕도회 수도원 소속인 경북 왜관의 분도출판사는 올해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오늘의 '분도'를 키워낸 주역인 임 신부에 관한 책을 펴냈다. 임 신부는 1971년부터 1993년까지 22년간 이 출판사 사장으로 일하며 400여권의 책을 출간했다.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우화집, 총 160여만권이 팔린 이해인 수녀의 글들도 임 신부가 사장일 때 출간됐다.

◇독재 시절, 핍박받는 이들과 함께

엄혹한 군사 독재 시절 임 신부의 분도출판사는 사회 비판적인 책들도 다수 펴냈다. 1977년 출간한 '해방신학'은 그 정점이었다. "처음에 3000권을 찍었습니다. 압수당할까 봐 밤새 수사들과 함께 수도원 옥상에 숨겼지요. 100권씩 1층에 내려놓고 팔거나 원하는 곳에 보냈어요. 책을 더 찍어냈다는 걸 당국에 들키지 않으려고 오탈자도 그대로 두고, 쇄판 변경도 하지 않은 채 14쇄, 5만3000여부를 찍어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 임 신부는 살아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만난 뒤 육성 증언을 인쇄물과 녹음테이프로 만들어 전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임 신부는 "군사 독재 시절엔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국의 독일 신부·수사들과 통화는 라틴어로 했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낯선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목숨을 모두 하느님께 맡긴 성직자입니다. 두려움 따윈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스토리텔러"

그는 타르코프스키와 키에슬로프스키 등 유럽의 작가주의 영화 60여편을 한국에 소개한 영화광이기도 하다. 임 신부가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성(聖)아우구스티누스' DVD 한 장을 들여 보였다. 베네딕도 미디어가 가장 최근 발매한 영화다. "몇 년 전 유럽에 갔을 때 교황께서 한국에도 꼭 이 영화를 소개해달라고 직접 말씀하셨어요. 젊었을 때 방황이 길었지만 어머니의 기도와 인내로 마음을 돌려 신학의 기둥이 된 위대한 학자입니다."

임 신부는 작년 11월 이 영화 DVD 발매 막바지 작업을 점검하러 서울에 왔다가 장충동 숙소 언덕배기에서 낙상(落傷)했다. 왼쪽 다리뼈가 부러져 지금까지 입원 중이다. 1987년 교통사고로 네 차례 대수술을 받은 뒤엔 지팡이를 짚고서 서울의 언론사를 직접 찾아다니며 새 영화를 소개했던 그는 병원 생활이 갑갑하기만 하다. "예수님도 늘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옮겨다니셨죠. 어딜 가든 수많은 군중이 귀를 기울이는 위대한 스토리텔러(story-teller)셨어요. 만약 예수님이 지금 세상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영화감독이 되시지 않았을까요?"